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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나빠도 된다”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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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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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을 어떻게든 화해를 시키려고 하니, 이렇게 머리가 아픈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한·일관계가 굳이 좋아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얘기도 들린다. 악화된 한·일관계를 변수가 아닌 상수로 두고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해 보자는 인식이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발표할 땐 지금과 달랐다. 일본의 경제협력이 필요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극복하느냐의 고비였다. 2008년처럼 세계경제위기가 와서 일본의 통화스와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는 일본 말고도 많다. “중국, 스위스 등과 맺은 통화 스와프로도 유사시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게 우리 금융당국의 진단이다.

북한 비핵화 문제를 푸는 데에 일본의 힘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 특보는 지난 2월 도쿄에서 “정전협정 변경의 당사자가 아니다. 일본의 역할은 없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한국의 손을 빌리고 싶은 건, 납치 문제 해결에 사활을 건 일본이다. 아쉬운 쪽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위안부 피해자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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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상황에서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가 가능할까. 역설적으로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과거사 사죄에 나섰던 건, 한·일관계가 양호할 때였다. 2010년 간 나오토 총리는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가 두루뭉술한 메시지를 던지는 수준이었다면, 간 담화는 한국을 명시해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보다 훨씬 솔직하고 성의있는 내용이 담긴, 획기적 담화였다. 이후 보수세력의 반대를 뚫고 조선왕실의궤와 규장각 도서 1205점 반환으로도 이어졌다. (조세영, 한일외교사) 민주당 집권 시절이긴 했지만, 2000년 이후 이 시기는 한일관계가 가장 좋았던 때로 꼽힌다.

국민 감정이 이렇게 악화된 상태에선 어떤 정권도 사과하자고 나서기 부담스럽다. “일본 기업은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따라야 한다”고 용기있게 목소리를 내는 일본 시민사회도 지지를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 한·일 위안부 합의는 파기의 길로 들어섰다. 대법원 판결 역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 차원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현 한·일관계는 해결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관계 악화의 책임을 한쪽에만 물을 수 없다. ‘피해자 중심주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에 빨리 나서길 바란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