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文 감동시킨 남자가 본 日보복 "韓 더 오르기전 누르겠단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의 직격인터뷰]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보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보(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우리는 축적된 산업 지식이 없다“고 했다. ’서점에 경제ㆍ경영ㆍ과학 코너만 있고 산업은 없다. 산업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부터 채워야 한다.“ 김상선 기자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보(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우리는 축적된 산업 지식이 없다“고 했다. ’서점에 경제ㆍ경영ㆍ과학 코너만 있고 산업은 없다. 산업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부터 채워야 한다.“ 김상선 기자

그의 생각은 하나씩 현실이 됐다. ‘제조업 르네상스’ ‘혁신지향 공공조달’ ‘소재ㆍ부품ㆍ장비 경쟁력 강화 방안’ 등 최근 정부가 발표한 정책 곳곳에 그의 주장이 스며 있다. 심지어 그를 만나고 며칠 뒤, 그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이 정부에서 흘러나왔다. 올 초 청와대 경제과학특보가 된 이정동(52)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저서 『축적의 길』에 강한 인상을 받아 청와대 전 직원에게 책을 선물했다. 그는 저서를 통해 ‘제조업 혁신’을 부르짖었다. 정부가 받아들여 제조업 르네상스에 시동을 걸려는 찰라, 일본의 경제 보복이 시작됐다. 이정동 특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80년대 미·일 반도체 분쟁과 비슷 #한국 산업, '골디락스' 누리느라 #신산업으로 진화 속도 느려져 #100조 정부 조달로 산업 깨워야

-일본이 우리 산업의 아킬레스건을 공략했다. 한국에 소재 공급하는 것을 일본 정부가 통제하게 됐다.
“전형적인 기술패권 경쟁이라고 본다. 비메모리 반도체와 수소차 같은 우리 미래산업을 일본이 겨냥한 게 그 증거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일본 간에 벌어졌던 반도체 분쟁과 비슷하다. (당시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 일본에 밀리자 미국은 보복 관세를 매기고 지식재산권을 침해했다며 일본을 압박했다.) 조심스럽지만 ‘한국 기술이 더 올라가기 전에 누르겠다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중국의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데 한국만 견제해서 일본이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나.
“중국과 한국은 분야가 다르다. 중국이 화웨이를 앞세워 5G 네트워크에서 치고 올라오자 미국이 견제에 나섰다. 일본은 센서와 시스템 반도체 같은 부문에서 한국을 누르려는 것이다.”

1차 인터뷰를 하고 사흘 뒤, 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일본의 기술패권 의도”를 언급했다. 그래서 한 가지를 전화로 다시 물었다.
-대통령과 교감이 있었나.
“뭐, 그건…. 많은 전문가가 그런(기술패권) 견해를 갖고 있으니까….”

이정동 특보는 "대통령을 얼마나 자주 만나드냐"는 질문에 "여러가지 경로로..."라고 답했다. 김상선 기자

이정동 특보는 "대통령을 얼마나 자주 만나드냐"는 질문에 "여러가지 경로로..."라고 답했다. 김상선 기자

-지금까지 일본과 국제 분업을 했던 전략 자체가 잘못된 건가.
“세상에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전부 하는 나라는 없다. 일본과의 국제 분업은 일본의 견제를 생각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최적화된 선택이었다.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견제가 상수가 됐다. 분업 구조를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일본 경제 보복의 원인이라고 보나.
“나는 산업 쪽에서 보는 사람이다. 노코멘트 하겠다.”

-우리가 이번 사태를 잘 극복해 낼지 걱정이 많다.
“ ‘불산’이란 물질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든 국민이 알게 됐다. 그동안 부품ㆍ소재와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얘기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전 국민이 이해하게 된 적은 없었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데 큰 힘이 된다. 아마 일본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이런 것 아닐까.”

-대기업은 어떻게든 다른 소재ㆍ부품 공급선을 찾아낼 거다. 중견ㆍ중소기업도 잘할 수 있을까.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펀드를 만들어 중견ㆍ중소기업이 소재 업체를 인수ㆍ합병(M&A)할 때 돕는 것 등이다. 연구ㆍ개발(R&D)도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소재ㆍ부품 자체를 개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소재나 부품이 바뀌면 관련 생산공정이 다 바뀐다. 소재ㆍ부품 개발보다 이렇게 생산공정을 바꾸는 데 돈이 더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정부가 이 부분까지 지원해야 한다. 새 소재ㆍ부품을 생산공정에 적용할 수 있도록 테스트하는 시설을 정부가 만들어야 한다. 그런 시설을 나는 ‘제조 인프라’라고 부른다.”

이정동 특보의 저서 '축적의 길'. 문재인 대통령이 강한 인상을 받아 청와대 전 직원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 김상선 기자

이정동 특보의 저서 '축적의 길'. 문재인 대통령이 강한 인상을 받아 청와대 전 직원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 김상선 기자

-사실 부품ㆍ소재 산업의 중요성은 20여년 전부터 얘기됐다. 그런데 성과가 없었던 것 같다.

“성과가 없다는 건 착각이다. 20년 동안 논 게 아니다. 2001년에 부품ㆍ소재 수출이 620억 달러였는데 지난해는 3162억 달러가 됐다. 엄청나게 발전했다. 점점 고급 소재로 심화하는 중이다.”

-“주력 산업이 늙어 간다”고들 한다. 전통적인 주력산업은 힘이 빠지는데 신산업은 나오지 않는다.
“잘못된 말이다. 신산업이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다. 하던 사업이 진화해 신사업이 된다. IBM은 하드웨어 회사에서 조금씩 바뀌어 컨설팅 업체가 됐다. 몬샌토가 종자 회사에서 바이오 기업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서 기존 산업을 진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화 속도가 느려졌다.”

-왜 진화가 잘 안 됐나.
“골디락스(Goldilocks,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 때문이라고 본다. 진화해야 할 시점에 진화가 필요 없을 정도로 따뜻한 환경이 조성됐다. 과거 우리는 선진 기업이 하는 걸 보고 있다가 우리가 좀 더 잘할 수 있겠다 싶으면 뛰어들었다. 얼마나 빨리 따라잡을까가 중요했다. 그건 우리가 잘했다. 하지만 몸집이 커지면서 바뀌어야 했다. 선진국도 안 해본 도전적 수요ㆍ제품ㆍ서비스를 만들어야 했다. ‘뉴 투 월드(new to world)’다. 그런데 그런 걸 해야 할 때 기존 사업 환경이 너무 좋았다. 환율도 좋았고, 중국이란 거대 시장이 옆에 있었다. 골디락스다. 그걸 누리다 보니 진화 속도가 느려졌다. 그 사이 우리의 장기였던 ‘따라잡기’ 방식은 중국이 따라붙었다.”

-뉴 투 월드, 즉 도전적 수요는 누가 어떻게 만드나.
“우선 대기업이다. 대기업이 중소 부품ㆍ소재 기업에 새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내가 이런 것 하려는 데 (부품ㆍ소재) 만들 수 있어?’라고 하면 중소기업들이 밤새워 개발할 거다. 그러면 공급망이 국내에 형성된다.”

-지금까지 ‘뉴 투 월드’를 별로 안 하던 대기업들에 그걸 할 능력이 있을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다. 문제도 자꾸 내봐야 출제 역량이 늘어난다. 대기업도 도전적 수요를 만들면서 점점 능력이 올라갈 것이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혁신 수요를 만드는 정부의 역할도 강조했다.
“정부 조달 규모가 연간 100조원이 넘는다. 정부가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제품ㆍ서비스를 주문하면 산업계가 깨어날 것이다. 세금은 그렇게 써야 한다.”

-정부 방안은 ‘혁신 인증을 받은 제품을 우대하겠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정부가 혁신적인 제품ㆍ서비스를 주문하는 것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인증된 혁신 제품을 공공 서비스 개선에 쓰도록 한 이번 조치를 1단계로 보면 된다. 2단계로 진화하면 정부가 아예 혁신제품 자체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걸 개발해 납품하라’는 식으로 조달 자체에 R&D를 결합할 수도 있다.”

이정동 특보는 말했다. "지식 측정 같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초중고 때는 세계 1등인데 성인은 평균이다. 성인의 지식을 높이는 데 초중고만큼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김상선 기자

이정동 특보는 말했다. "지식 측정 같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초중고 때는 세계 1등인데 성인은 평균이다. 성인의 지식을 높이는 데 초중고만큼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김상선 기자

-정부의 혁신성장 의지에 대해 말들이 많다. 승차공유만 해도 어정쩡하게 결론 났다. 기존 택시사업자에게 유리하고, 신규 벤처가 뛰어들 길이 사실상 막혔다는 중론이다.
“새로운 모델이 들어오는 과정에는 사회의 맥락이 작용한다. 각종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그걸 원만하게 하자고 만든 인간의 장치가 정치 아닌가. 우리 정치의 수준이 혁신을 저해하는 요인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 정치의 혁신 지향성을 강화할 것인가, 그게 문제다. 어쨌든 시민들 의견을 고려해 타협안이 나왔다. 앞으로 입법 과정에서 또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거다.”

 -규제 샌드박스도 별로 허용되는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유주방처럼 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고…. 중요한 건 허용과 불허가 아니라 하나하나 샌드박스에서 시험에 나가면서 수많은 경험과 사례를 얻는 것이다. 규제와 관련해서는 또 ‘규제가 필요한 이유를 담당 공무원이 설명하지 못하면 없애겠다’고 정부가 공언하지 않았나. 정말 큰 변화다. 지켜보자.”

-주 52시간 근로제가 혁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R&D는 업무 특성 때문에 좀 더 유연하게 적용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건 상식적으로 판단될 것이다.”

-정부가 이공계 병역 특례(석사 이상이 중소기업에서 대체 복무)를 줄이려고 한다. 중기와 벤처의 R&D 역량이 영향을 받을 것 같다.
“그건 정말 유지 또는 확대해야 한다. 중소기업이 우수 기술인력을 확보하는 핵심 제도다. 병역 특례를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인력도 있다. 이들은 산ㆍ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다. 학교에서 비커에 약품 따르는 것과 실제 상품을 만드는 건 전혀 다르다. 병역 특례자는 그걸 경험하고 온다. 그러면 학교에서 연구할 때 생각 자체가 달라진다. 이런 인력이 현장 기술을 개발해 기업을 돕는 게 나라를 지키는 길 아닐까. 이공계 대체 복무는 정말 중요하다.”(인터뷰 며칠 뒤, 정부는 이공계 병역 특례 축소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특보로서 제안하는 것들이 잘 받아들여진다고 보나. 실제 저서와 인터뷰 등을 통해 역설한 게 많이 정책 반영되는 것 같다.
“조심스럽다. 정책을 내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무리가 있다.”

-산업 혁신에 대학과 교육의 역할이 있을 텐데.
“기술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예컨대 농부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하면 버섯 농사를 더 잘 지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떠올리는 게 기술 감수성이다. 지금 기업과 사회는 문제가 있어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모른다. 반대로 대학의 전문가들은 문제 풀 능력은 있으나 뭐가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지를 모른다. 기술 감수성을 높여 이 둘을 만나게 하는 게 도전적ㆍ혁신적 수요를 만드는 길이다.”
-구체적으로 기술 감수성을 높이는 방법이 뭘까.
“회사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대학에서 공부하게 해야 한다. 회사에서 문제를 대학 수업에 끌고 들어오게 하는 거다.”
-초ㆍ중ㆍ고 교육은 어떤가.
“대학로에 있는 대안학교 ‘미래교실네트워크’에 가 봤다. 소프트웨어 짜는 과제 발표를 하는데, 이 친구들 눈빛이 숙제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을 설득하려는 거였다. 글쎄, 창조적인 최고경영자(CE0)라면 일반 학생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학생들을 택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학습을 촉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기록=김혜린 인턴기자

이정동 특보는...

 중학교 때는 문학을 꿈꿨다. 소설도 써보고, 친구들과 자작 시ㆍ평전 등을 모아 동인지(同人誌)를 만들었다. 그러나 수학(그는 ‘산수’라고 표현했다) 점수가 높아 공대에 진학했다. 턱수염은 몇 년 전 ‘중년의 반란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에 길렀다. 그러다 깎으려고 했는데, 일종의 반항심(?)에 계속 기르게 됐다. 학교에서 누군가로부터 “단정치 못하게 수염이나 기르고…”란 말을 듣는 순간 ‘자율과 창의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수염 하나 허용치 못한다면…’이란 생각이 들어 오기로 길렀다고 했다. 저서로 『축적의 길』(사진), 『축적의 시간』 등이 있다. 대구 계성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자원공학 학ㆍ석사, 기술정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학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인 이정동 특보는 중학교 시절 헤밍웨이 평전을 쓴 문학 소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저서에서는 인문학적 기질이 엿보인다. 김상선 기자

공학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인 이정동 특보는 중학교 시절 헤밍웨이 평전을 쓴 문학 소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저서에서는 인문학적 기질이 엿보인다. 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