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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 작가' 그림 가차없이 찢었다…호크니가 믿은 '절친'

중앙일보

입력

탈색한 금발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젊은 시절 데이비드 호크니. 수영장에서의 한떄. (ⓒ David Hockney)[사진 그린나래미디어]

탈색한 금발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젊은 시절 데이비드 호크니. 수영장에서의 한떄. (ⓒ David Hockney)[사진 그린나래미디어]

“호크니는 왜 이렇게 ‘물’에 매료됐을까?”

‘더 큰 첨벙’ ‘예술가의 초상’ 등 수영장을 그린 그의 대표작들을 보면 자연히 드는 질문이다.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전이 4개월 동안 30여만 관람객을 동원하며 지난 4일 막을 내렸다.
그는 여든둘인 지금도 ‘현역’이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등 감각적 시도와 독특한 색채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8일 개봉한 다큐 ‘호크니’(감독 랜달 라이트)는 그에 관한 궁금증을 채우기에 제격. 호크니의 삶과 작품세계를 그 자신과 가족‧친구들의 인터뷰로 두루 조명했다. 다큐 속 그의 대표작을 육성 해설과 함께 미리 감상해본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왜 계속 인기일까 #30만 본 전시 이어 다큐 8일 개봉

영원이 된 찰나 ‘더 큰 첨벙’

“작가님은 왜 계속 인기 있을까요?”

“글쎄요…. 전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그것을 단순화해서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그런 의도가 잘 전달된다면 사람들이 반응하겠죠.” 

호크니의 젊을 적 인터뷰다. 그는 늘 “새롭게 보는 방법”을 찾아 “새롭게 느끼려” 시도했다. ‘더 큰 첨벙’이 한 예다. 국내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다.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1967, Acrylic on canvas, 96" x 96", ⓒ David Hockney) [사진 Collection Tate London, 그린나래미디어]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1967, Acrylic on canvas, 96" x 96", ⓒ David Hockney) [사진 Collection Tate London, 그린나래미디어]

다이빙대 아래 수영장 물이 튀어 오른 찰나를 마치 사진 찍듯 포착했다. 아니, 사진보다 더 생생하다. 스스로를 ‘사진쟁이’라 부를 만큼 카메라 작업도 즐겼던 호크니다. 그러나 그는 “사진 속에 정지된 순간은 비현실적”이라며 “드로잉이나 그림에 있는 생생함이 사진엔 없다”고 했다. 이를 그림과 사진의 속성으로 설명했다. “램브란트는 자신의 얼굴을 오랜 시간 면밀히 관찰해 그 ‘긴 시간’을 자화상으로 담아냈어요.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이죠. 사진은 반대죠. 사진을 고작 4초 본다 해도 카메라가 (그 순간을) 본 시간보다 긴 시간이에요. 자명하고 치명적인 약점이죠. 그림은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이런 발견을 ‘더 큰 첨벙’에 고스란히 적용했다. 그는 이 작업이 흥미로웠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 물이 튀는 시간은 1초 정도죠. 그런데 이 튀는 물을 그리는 데는 일주일이나 걸렸어요. 가느다란 선들로 섬세하게 표현했죠.” 그렇게 그는 찰나를 영원으로 만들었다.

1000억짜리 그림 ‘예술가의 초상’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of an Artist, 1972 ⓒ Christie's Images Ltd 2018)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of an Artist, 1972 ⓒ Christie's Images Ltd 2018)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호크니에게 ‘현존하는 가장 비싼 작가’란 별명을 선사한 작품이다. ‘예술가의 초상’은 지난해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031만 달러(약 1091억원)에 낙찰됐다(6개월 뒤 제프 쿤스의 조각 ‘토끼’가 이 기록을 경신했다). “전 이 그림의 아이디어를 좋아해요. 실재하는 대상이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렸는데, 그 ‘다른 모습’은 물 때문에 형태가 자연스럽게 왜곡돼있죠.” 그의 말이다.
196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그는 수영장부터 빗물‧스프링클러 등 물을 즐겨 그렸다. “물은 ‘어느 지점’을 볼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에요. 반사된 부분이나 물 표면을 보다 갑자기 물속을 볼 수도 있죠.” 물에 매료된 이유다.
그가 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었던 비결도 공개했다. “아크릴 물감을 매우 엷게 희석한 후 세제를 섞어 캔버스에 바르면 캔버스가 흡수지처럼 물감을 흡수해 물의 유동적이고 젖은 느낌을 살릴 수 있죠.”

호크니식 사랑 ‘클라크 부부와 퍼시’

'클라크 부부와 퍼시'(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0-1971, Acrylic on canvas 84" x 120", ⓒ David Hockney) [사진 Richard Schmidt Collection Tate London, 그린나래미디어]

'클라크 부부와 퍼시'(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0-1971, Acrylic on canvas 84" x 120", ⓒ David Hockney) [사진 Richard Schmidt Collection Tate London, 그린나래미디어]

“만약 나라가 무너지는 마침 그 날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죠. 세상이 멀쩡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단란한 커플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 호크니의 말이다. 로맨티스트였던 그는 동성 연인 피터와 헤어지고 한동안 그림을 제대로 완성할 수 없을 만큼 힘겨워했다. “사랑의 부재는 곧 두려움이다.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두려움이 없다.” 그가 남긴 말이다.

'크리스 이셔우드와 돈 바카디'(Christopher Isherwood and Don Bachardy, 1968, Acrylic on canvas, 83 1/2" x 119 1/2", ⓒ David Hockney)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크리스 이셔우드와 돈 바카디'(Christopher Isherwood and Don Bachardy, 1968, Acrylic on canvas, 83 1/2" x 119 1/2", ⓒ David Hockney)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있는 그대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비버리 힐스 가정주부(Beverley Hills Housewife, 1966-1967, Acrylic on canvas 72“ x 144", ⓒ David Hockney) [사진 Richard Schmidt, 그린나래미디어]

비버리 힐스 가정주부(Beverley Hills Housewife, 1966-1967, Acrylic on canvas 72“ x 144", ⓒ David Hockney) [사진 Richard Schmidt, 그린나래미디어]

호크니는 포즈를 오래 취해야 하는 인물화의 경우 피사체를 사진으로 찍어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비버리힐스 가정주부’(1966~1967‧사진)를 그렸을 때 그는 컬러가 아닌 흑백사진만 세 장 찍었다. “어차피 사진에 담긴 색은 실제와 전혀 다르다”는 게 이유였다. 또 다른 대표작 ‘푸른 기타’ 연작에 영감을 준 미국 시인 윌리스 스티븐스의 시 ‘푸른 기타를 든 남자’(The Man with the Blue Guitar)에서도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연주하지 않는군요’란 구절을 즐겨 읽었다. “피카소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잖아요. 있는 그대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회화에선 있는 그대로 보려고 사용하는 도구들 때문에 결국 눈을 속이게 되죠.”

거장의 정체 ‘붉은 멜빵을 한 자화상’

붉은 멜빵을 한 자화상(Self Portrait with Red Braces, 2003, Watercolour on paper 24" x 18 1/8", ⓒ David Hockney) [사진 Richard Schmidt, 그린나래미디어]

붉은 멜빵을 한 자화상(Self Portrait with Red Braces, 2003, Watercolour on paper 24" x 18 1/8", ⓒ David Hockney) [사진 Richard Schmidt, 그린나래미디어]

“나는 내가 좋을 때 좋아하는 것을 그린다.” 호크니가 스스로 그린 얼굴에도 드러나는 그의 집요하고 굽히지 않는 면모는 삶에서도 발견된다. 동성애가 불법이었던 1960년대 미국에서 그는 게이임을 감추지 않았고, 대단한 골초였으며, 유행이 지난 문학에 심취해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했다.
“고집이 세다.” “귀가 어둡다.” “지나치게 관대하다.” “이성의 탈을 쓰고 감정적이다.” “가끔 너무 대담하다.” “‘본의 아니게’ 무례하다.”
어느 날 식당에 모인 가까운 친구들이 농담 반 늘어놨다는 호크니의 장‧단점이다. “늘 이론을 고수하고, 뭔가 하나에 꽂혔을 땐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 같았다”는 증언도 나온다. 호크니 자신이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은 이랬다. “남들이 뭐라 생각할지 걱정하지 말라셨죠. 정말 그렇게 믿으며 살았어요.”

삶을 관통한 친구 ‘헨리’ 그리고 ‘엄마’

헨리(HENRY, 1988, OIL ON CANVAS 24 X 24", ⓒ David Hockney)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헨리(HENRY, 1988, OIL ON CANVAS 24 X 24", ⓒ David Hockney)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가족 다음으로 호크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 바로 ‘헨리’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그는 호크니와 매일 20~30분씩 전화통화하며 예술‧책‧우정‧연인‧가십 등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공유했다. 호크니가 문학에 깊이 심취한 데도 헨리의 영향이 있었다. 호크니의 부탁으로 6개월마다 한 번씩 그간의 그림들 중 좋은 작품을 골라준 것도 그였다. 남길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찢거나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다.

엄마(Mum, 1988-1989, Oil on canvas 16 1/2" x 10 1/2", ⓒ David Hockney) [사진 Collection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그린나래미디어]

엄마(Mum, 1988-1989, Oil on canvas 16 1/2" x 10 1/2", ⓒ David Hockney) [사진 Collection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그린나래미디어]

호크니는 1937년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 시절 호크니가의 다섯 형제는 작고 어둠 가득한 집에서 궁핍하게 자랐다. 그럼에도 “삶이 늘 재밌었던” 이유는 아이다운 천진함에 더해, 강직했던 부모의 덕분. 예술가를 키워낸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머니는 강한 여성이었어요.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저를 바라봤죠. 1900년에 태어나 20세기를 꽉 차게 살고 99세에 돌아가셨어요.” 호크니의 말이다.

호크니가 부모님을 그린 '나의 부모님'(1977, 캔버스에 유채, 182.9ⅹ182.9 cm.ⓒ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 Tate, London 2019)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크니가 부모님을 그린 '나의 부모님'(1977, 캔버스에 유채, 182.9ⅹ182.9 cm.ⓒ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 Tate, London 2019)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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