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더 냉철한 경제·외교 전략 있어야 “전화위복” 가능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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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일 관계가 1965년 국교 수립 이후 최악의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수출 절차 우대국)에서 배제한 일본의 조치는 자유무역 체제를 뒤흔드는 처사로 철회돼야 마땅하다. 무역의 무기화는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자국에도 피해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역사·외교 문제를 경제 문제로 확대한 일본의 도발에는 ‘전쟁 가능한 정상국가’ 일본을 향한 아베의 야욕이 깔려 있다.

단호하되 냉정한 대응이 극일의 길 #싸움 뒤를 생각하는 것이 정부 책무 #지소미아 파기·독도 훈련 신중해야

일본의 무도한 행동에 우리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의 감정을 존중하고 이를 극일(克日)의 계기로 삼는 것은 정부의 마땅한 책무다. 그러나 소모적 반일 감정을 부추기거나 이에 편승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경제 전쟁’으로 규정하며 총력 대응을 선언했다. 그러나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냉정한 전략과 현실적 대응이 필요하다. 기초 소재 및 부품, 장비 산업의 대일 의존 탈피는 한·일 갈등 국면 때마다 나온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개선은 없었다.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일본에서 소재·부품·장비를 수입해 반도체·OLED·화학 등 중간재와 자본재를 만들어 이를 해외에 수출하는 산업 전략을 취해 왔다. 이런 전략이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지만, 글로벌 공급망에서 취약점도 발생했다. 이번 한·일 충돌은 이런 약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산업구조 재편이나 기초 기술 개발이 마음먹는다고 단기간에 뚝딱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흥분하는 대신 치밀한 중장기 전략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천해 가는 것만이 답이다.

당장 시급한 것은 우리 기업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어제 고위 당정협의회는 “일본의 경제 보복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를 위해 소재 부품 산업의 육성,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적 분업, 제조업 혁신, 청장년 일자리 늘리기 등을 내걸었다. 필요한 일이고, 차질없이 추진돼야 할 정책이다. 그러나 당장 원료와 부품이 끊어질지 모를 기업들엔 격화소양(隔靴搔癢)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본 외 대체 구매처 확보를 위한 예산·세제 지원, 기술 개발 노력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의 개선 등 구체적 기업 지원 정책이 시급하다. 경제 전쟁에 나서는 기업의 사기를 꺾는 반기업 정책도 이번 기회에 손볼 필요가 있다.

어제 당정협의회에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아베 정부의 목표가 일본 내 개헌과 한국 내 친일세력의 구축을 통한 군국주의 부활이 아닌지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1919년 만주에 설립됐던 독립군 양성학교) 신흥무관학교처럼 ‘기술무관학교’들이 들불처럼 중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혹시 정부의 감정적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친일세력’으로 딱지 붙인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주권 국가인 지금 대한민국을 일본 강점기에 비교한 것도 자기비하적인 느낌이다.

이럴 때일수록 냉철한 위기관리가 절실하다. 한·일은 결국 싫든 좋든 머리를 맞대고 살 수밖에 없는 이웃이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그 뒤를 생각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 한 ·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나 독도 군사훈련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본을 압박할 카드는 될 수 있겠지만, 자칫 한·미·일 안보협력체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제 전쟁이 장기화되고, 갈등이 확대될수록 양국 국민의 피해는 커진다. 한·일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이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