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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이 만난 사람] “대법 판결 후 예견된 한·일 갈등, 정부 대응 아마추어 같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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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호 06면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 

“글쎄 말이에요. 탈출구가 보여야 하는데 잘 안 보이네….”

공로명(87) 전 외무부 장관(1994년 12월~96년 11월)은 얼굴이 어두웠다. 그는 대표적인 일본통이다. 58년 외교부에 들어가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지원했다. 아주(亞洲)국장과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그가 주일대사 때(93년 4월~94년 12월)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관여한 사실을 인정한 ‘고노 담화’와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담은 호소카와 총리의 ‘경주 발언’이 나왔다. 외무부 장관 시절에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 사실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다. 지난 달 30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동아시아재단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최근 상황이 답답한지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격정적으로 원로의 걱정을 쏟아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나쁘다고 얘기하기가 마음이 아픈 얘긴데, 우리끼리 솔직하게 얘기하면 자업자득입니다. 일본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우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정치적 결심을 해 이뤄낸 한·일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파기해 버린 거죠.”

외교권 활용 양국 충돌 미리 막았어야

그 합의를 하는데 공 전 장관도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는 대단히 어렵게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현인 회의를 하고,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를 끌어내고,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자민당 총재 등의 도움을 받아 아베 정부를 설득한 것이거든요.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상 아버지죠. 모리 전 총리와 이홍구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일 관계에 관여한 많은 분이 합심해서 아베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을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든 것을 하루아침에 뭉개버리니까 응어리가 남은 거죠.”

그는 또 강제징용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지적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이랄까, 쐐기를 박은 게 작년 대법원 판결이거든요.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을 때 청구권 자금 면에서 모든 게 해결됐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정치적인 결정이죠. 그에 따라 한국 정부가 70년대부터 증명이 된 분들에게는 보상해줬습니다. 노무현 정부까지 (보상을) 계속 이어왔어요. 작년 말 개인청구권은 살아있다는 취지에서 판결했으니까, 해결됐다고 하는 일본 쪽과 충돌한 거죠. 이런 모든 점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 정부는 삼권 분립이라 사법부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왜 자업자득이냐 하면 대법원 판결이 나왔을 때 이런 상황이 예견된 것 아닙니까. 작년 11월인가 이낙연 총리가 20~30명을 모아 의견을 들었어요. 나도 갔어요. 결국 우리가 금전적인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의견들이었어요. 한국에 있는 일본 기업 재산으로 하게 할 경우 양국 간에 큰 문제가 생기니까 그러지 말고 기금을 만들자. 한국 정부와 국교 정상화로 혜택을 본 한국기업, 내겠다면 일본기업도 권유해 3자가 만들자는 거죠.”
어떻게 됐나요?
“이 총리가 청와대에 그런 안을 올렸는데 거부했다는 겁니다. 우리 헌법에서 외국과의 관계는 대통령에게 권한이 있는 것 아닙니까. 외교권을 활용해 충돌을 막지 못하고 지금 상황에 온 건 자업자득이라고 봐요. 뒤늦게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기금을 만들어 보상하자는 안을 덜컥 일본 측에 내던졌단 말이에요. 일본은 일본 기업이 참여하는 건 반대한다는 입장이니까, 제안하기 전에 정지작업을 해야죠. 아무 기초도 없이 내던지면 일본 측이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나오겠어요? 너무나 아마추어 같아요.”
일본 정부까지 돈을 낸 화해·치유재단을 해체했는데, 다시 기금을 만들자면 앞뒤가 맞지 않는데.
“그래서 일본 측이 못 받겠다는 거죠. 결과가 명약관화한데 아무런 조치도 없이 이런 사태를 만드느냐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말이죠, 의도된 것 아니냐 하는 생각마저 하게 돼요. 어떤 사람은 내년 선거를 위해 그랬다는 얘기도 하는데, 난 그렇게까지 비틀어진 시각으로 보기 싫지만,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자해행위이고 자작극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공로명 전 외무장관은 ’결과가 뻔한데 이런 상황이 되도록 만든 건 의도된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며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자해행위이고 자작극 같은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공로명 전 외무장관은 ’결과가 뻔한데 이런 상황이 되도록 만든 건 의도된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며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자해행위이고 자작극 같은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일본은 자기들이 제의한 중재안에 대한 해답을 바라는 것 아닙니까? 한·일 협정에 의한 절차를 밟아 오는 것이거든요. 우리도 청구권 협정으로 돌아가서 중재를 왜 못해요. 중재위원회라는 것은 양측이 지명하는 위원이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회를 두고 중재하는 거 아닙니까.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중재위원회예요. 무엇이 무서워서 못하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자꾸 일본에 협의하자고 해요. 안 받아요. 왜 안 받느냐. 일본이 협의하자고 했는데 안 했거든. 처음에. 이제 (일본이) 중재 가자고 하니까 (한국은) 협의하자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례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사태를 풀기 위해서는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요. 중재를 받고, 중재하는 동안 제재도 동결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해요. 그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외교 교섭을 병행하면서 점차 길을 찾아 나가야죠. 물어볼 게 있는데 그동안에 누가 일본에 가서 이면 공작을 했습니까?”
못 들어 봤습니다.
“나도 못 들어봤어요. 이런 중대한 일인데 어떻게 이면 공작을 안 합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 인맥이 있단 말이에요.”
특사가 가도 변화를 도모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전제돼야 하지 않나요.
“그동안에 여러 가지 안이 올라갔는데도 통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께서 생각이 다른 데 있으신 거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사건(강제징용)이 소송의 출발이 부산에서부터 있었고, 그때 담당 변호사가 문 대통령이었는데, 지금은 대통령입니다. 변호사 입장하고는 다르잖아요. 법이라는 게 A냐, B냐 하는 거지, C는 없어요. 그래서 외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해럴드 니컬슨의 『외교론』을 보면 ‘최악의 외교는 법학’이라는 거에요. C가 없다는 거죠. 참 딱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중재위원회 간다고 하고, 풀어야 해요.”

그는 “일본하고 적대 관계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자금 5억 달러+α를종잣돈으로 해서 우리 경제가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제가 1966년부터 3년간 주일대사관에 근무했는데, 30대 기업 총수들이 차관을 얻기 위해 문턱이 닳게 드나들었어요. 세계 제10위 경제로 발전하는 큰 받침돌 역할을 한 게 일본입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려고 하면 무슨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토착 왜구’ 말이죠? 정치에 외교가 이용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우리 국민 모두가 노력을 해야 하는데, 특히 미디어가 많이 노력해주셔야 해요. 우리 국민은 의식하든 않든 반일 감정이 강하거든요. 결국, 그게 표로 연결되니까 그런 일이 자꾸 쌓이는 거 같아요. 일본은 안보나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귀중한 존재거든요. 더욱이 중국이 저렇게 강력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살아날 길은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한·미·일 가치동맹을 만들어 가는 도리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만 우리가 예속되지 않는 독립국가로서, 우리가 바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날 수 있단 말이죠. 지금같이 감정적으로 움직이면 스스로 발등을 찍는 겁니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30일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김상선기자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30일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김상선기자

우리는 중재자 역할을 강조하지만, 미국과 일본은 ‘너희는 어느 편이냐’고 추궁하는 것 같아요.
“대학생하고 대학생이 싸우는데 초등학생이 와서 ‘언니들 내가 중재할게’ 하면 중재가 됩니까? 중재하려면 힘이 세야 해요. 중국이 우리가 중재한다고 말 듣겠어요? 미국이 말 듣겠습니까? 미국의 친구로서 우리가 조언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중재자로서 말하자면 ‘무슨 소리냐?’ 할 겁니다.”
65년 국교 정상화나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마무리되는 것 같다가 다시 갈등이 재연됩니다. 외교의 연속성이 없어요.
“민주주의가 갖는 약점이죠.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노선이 약간 변화가 생기는 것은 할 수 없죠. 김대중-오부치 공동성명은 한·일 관계의 하나의 귀감이고 지침입니다. 통일정책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지만, 한·일 관계에 대한 그분의 생각에는 참 공명하는 부분이 많아요. 대통령 선거할 적에 한 표가 아쉬운데, 일본 문화 개방을 얘기했어요. 소신이 있는 양반이에요.”
대법원과 외교부가 사전 협의한 것이 수사받고 있는데, 과거 이런 일이 많지 않았나요.
“나름대로 협의가 이뤄졌어요. 어느 나라나 외교 문제가 국내 사법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사법의 자제’라는 원칙이 있죠. 일본은 최고재판소 판사에 외교부 출신을 반드시 넣습니다. 유럽 많은 나라가 그런 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65년 합의 땐 개인청구권 생각 안 해

대법원 판결은 어떻게 보세요.
“2명의 대법관은 해결됐다는 입장을 취했어요. 행정부의 외교적인 결정을 존중해줬습니다. 대법원이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입장을 유지해 이런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우리가 65년에 합의할 때는 개인청구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70년대에 내가 일본 법률잡지를 보니까 도쿄대 오누마 야스아키(大沼保昭) 교수가 개인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학설을 소개했어요.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나온 학설입니다. 루소의 인권 사상에서 유래하는데 개인 청구권은 천부의 권리라서 국가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게 일본을 거쳐 우리 대법관들에게도 많이 퍼진 것 같아요. 그러나 헌법은 외교권을 행정부에 줬단 말이에요. 국제관계를 관리하는 책임은 행정부에 있어요.”
지금 사태를 풀기 위해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선 일본하고 소통했으면 좋겠어. 중재안을 받으라는 것도 소통을 하기 위한 방법인데, 현재 상황을 더는 나쁘게 하지 말고 해결하는 방법으로 중재안을 받아서 가자는 거죠. 중재위에서 어떤 안이 제시되면 그때 가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빼게 되면 정말 이건 우리로서도 참기 어려운 상황이란 말이에요. 완전히 적성국을 만드는 것 아니에요. 그건 일본도 하면 안 되고. 그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죠. 화이트 리스트에서 빠지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이고, 당장 우리 목이 졸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선 일본하고 소통 좀 했으면 좋겠어. 정문으로 갈 수 없으면 뒷문으로라도 가야죠.”
초대 러시아 대사(90년 10월~92년 1월)이신데, 러시아 군용기가 영공을 침범하고, 우리 전투기가 사격까지 한 사태는 어떻게 봅니까.
“모스크바나 베이징에서 볼 때 한반도에 지금 커다란 공백이 생기고 있는 게 보이지 않겠어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저렇게 널판 뛰듯 하고, 준동맹 관계로 똘똘 뭉쳐야 할 한국과 일본은 으르렁대고 말이죠. 그러니까 무주공산 같이 보이지.”
북한이 최신형 미사일을 쏴도 트럼프 대통령은 다 가지고 있는 거라는 식으로 시큰둥해요.
“섭섭한 얘기죠. 부시나 오바마 정부였다면 저런 코멘트는 안 나오죠. 우리가 한·미 동맹을 좀 더 단단하게 결속하고 있으면 이런 틈새가 생기지 않을 거예요. 한국 정부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지나가니까… 외국 정부에서 볼 때는 무주공산 같지.”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은

공로명 전 장관은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다. 경기중 6학년 때 중·고 과정이 분리돼 경기고 첫 졸업생이 됐다. 졸업 직후 육군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중 외무부에 들어갔다. 한·일 회담이 벌어졌던 64년부터 동북아과와 개설된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동북아과장, 아주국장,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주 소련 영사처장으로 수교작업을 한 뒤 주 소련대사, 주 러시아 대사를 맡았다. 83년 중국 민항기 송환 협상을 주도했다. 카이로와 뉴욕 총영사와 브라질 대사도 거쳤다. 김영삼 정부 때 외무부장관이다. 한일포럼 회장과 세종재단 이사장을 거쳐 동아시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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