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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 때문에 시작한 전쟁, 오히려 '황금알 낳은 거위 배' 갈랐다

중앙일보

입력

Focus 인사이드  

유럽이 프랑스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19세기 초반에 중남미에 위치한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이 우후죽순처럼 독립했다. 그런데 지배국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대강 나눈 지역들을 기반으로 신생 독립국들이 들어서다 보니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다. 미개척지가 많았고 인구도 적어 한마디로 먼저 깃발을 꽂은 쪽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자원 놓고 벌어진 전쟁 #내정 실패가 분쟁 촉발

태평양 전쟁 당시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한 칠레군 [사진 wikipedia.org]

태평양 전쟁 당시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한 칠레군 [사진 wikipedia.org]

따라서 툭하면 영토 분쟁이 벌어지고는 했는데 경우에 따라 전쟁까지도 벌어졌다. 반면 러시아가 알라스카를 미국에 팔아버린 예에서 보듯이 개척이 어렵다고 판단한 곳은 미련 없이 포기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당장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싸워서라도 차지하려 들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무관심했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 새롭게 경제적인 가치가 드러나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태평양 연안의 안토파가스타 지역은 칠레의 주요 외화 획득 수단인 구리가 엄청나게 매장된 보물 창고다. 그런데 원래 이곳의 주인은 볼리비아였다. 현재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파라과이와 더불어 둘뿐인 내륙국이지만 1825년 독립 당시에 안토파가스타를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 독립한 볼리비아가 이곳을 영토로 확보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칠레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원래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는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후 칠레의 경제적 요충지가 되었다. [사진 wikipedia.org]

원래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는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후 칠레의 경제적 요충지가 되었다. [사진 wikipedia.org]

그랬던 이곳이 칠레의 영토가 된 것은 1879년에 발발한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에서 볼리비아-페루 연합국을 물리친 이후부터다. 경제적인 마찰로 전쟁이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구리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날 칠레에 구리는 세계 생산량의 30~40% 정도를 담당하는 중요한 재화지만 운송 인프라가 구축되고 탐사 및 채굴 기법이 발달한 1930년대 이후가 돼서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구리 이전에 안토파가스타가 주목받은 이유는 구아노와 초석 때문이었다. 지금은 부정되지만 19세기 직전에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산업혁명 후 인구가 급속히 늘어난 데 비해 한정된 토지에서 곡물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어려워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침략을 노골화할 때 거론한 핑계 중 하나가 식량을 자급하기 어려울 만큼 자국의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페루의 구아노 광산. 바닷새의 배설물이 축적되어 화석화한 구아노는 초석과 더불어 대단히 좋은 비료이자 화약의 원료로 남미 태평양 연안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사진 wikipedia.org]

19세기 중반 페루의 구아노 광산. 바닷새의 배설물이 축적되어 화석화한 구아노는 초석과 더불어 대단히 좋은 비료이자 화약의 원료로 남미 태평양 연안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사진 wikipedia.org]

구아노와 초석은 이런 고민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만큼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최고의 비료다. 문제는 이들이 산출되는 곳이 지구 상에서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는 중요한 산지였다. 당시 자금과 인력이 부족했던 볼리비아는 이들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1874년 25년간 면세 혜택을 제공하기로 칠레와 조약을 체결하고 투자를 유인했다. 이후 많은 칠레인과 기업이 진출해 개발에 나섰다.

그런데 연이은 내정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이 커진 볼리비아가 1878년 조약을 무시하고 세금을 부과했다. 현지에 진출한 칠레인들이 납부를 거부하자 볼리비아는 자산을 압류했고 이에 격분한 칠레가 1879년 2월 14일, 군대를 안토파가스타로 진격시키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볼리비아와 동맹이었던 페루도 참전했으나 서전에 칠레가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대세가 결정되었고 4년 후 볼리비아·페루의 항복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화학비료의 효과를 알 수 있는 작물 시험 재배 모습. 1905년 암모니아 합성법이 발명되기 전까지 구아노, 초석 등이 비료로 사용되었는데 가격도 비싸고 산출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사진 phys.org]

화학비료의 효과를 알 수 있는 작물 시험 재배 모습. 1905년 암모니아 합성법이 발명되기 전까지 구아노, 초석 등이 비료로 사용되었는데 가격도 비싸고 산출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사진 phys.org]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칠레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에 현혹되어 정책을 조변석개로 바꾼 볼리비아가 명분을 제공했다. 그렇게 볼리비아는 구아노, 초석은 물론 훗날 더욱 중요성이 커진 구리를 포함한 자원의 보고이자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안토파가스타를 완전히 상실했다. 투자라고 생각하고 25년만 참으면 이후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성급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대가는 이처럼 혹독했다.

독식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유사 이래 전쟁의 가장 중요한 발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역사는 주고받고 나누어 사용할 때 더 큰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런 점에서 그 여파가 현재도 진행 중인 19세기의 태평양 전쟁은 좋은 교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피를 부른 구아노와 초석은 1905년 프리츠 하버가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명한 덕분에 경제적 가치가 급격히 추락했다. 이처럼 자원의 가치도 시대와 기술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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