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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로 읽기, 한 작가 책 다 섭렵…깊고 넓어진 독서 동아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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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호 19면

책읽는 사람들

9년째 세계문학을 읽는 고려대 서화회 동문 독서 동아리. 왼쪽부터 이영미·양정수·이용철·조진희·안선덕·이관직씨. 신인섭 기자

9년째 세계문학을 읽는 고려대 서화회 동문 독서 동아리. 왼쪽부터 이영미·양정수·이용철·조진희·안선덕·이관직씨. 신인섭 기자

책읽기는 단순한 여가활동이 아니다. 나를 확장하고 자존감을 높여 결국 공동체에 기여하는 길이다.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 독서 열기를 높이기 위해 뛰는 사람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책 모임 만들어 함께 읽기 바람 #북카페·북콘서트·북토크 인기 #유료 독서클럽에도 사람들 몰려 #독서 동아리 작년 3만8000여 개 #심층적으로 읽어 인식의 폭 넓혀 #개인·가족·사회 변화 이끌 단초

열린책들 출판사의 김영준 편집이사는 요즘 1000쪽 두께의 ‘벽돌책’을, 그것도 독일어 원서로 읽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의 대표작인 1924년 장편 『마의 산』이다. 독일어 실력이 신통해서가 아니다. 시작은 조금 싱거웠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불어 원서로 읽을 사람을 찾는다는 누군가의 게시물을 페이스북에서 우연찮게 본 게 지난해 9월. ‘나도 해볼까.’ 『마의 산』을 대뜸 원서로 읽자고 제안했더니 뜻밖에도 한양대에서 음악학을 가르치는 하승완씨, 팝음악 평론가 이경준씨, 이씨의 서강대 영문과 선배인 평범한 회사원 이왕군씨가 호응해왔다. 네 명은 10개월째 일주일에 한 차례, 한 번에 한쪽씩 거북이 독서를 한다. 지금껏 40쪽 남짓 읽었다. 완독에 7년이 걸리는 대형 버킷리스트다. 김 이사는 “7년 동안 뭔가를 지속한다는 게 이상한 안정감을 준다. 혼자서는 죽어도 못할 일인데, 함께 읽으니 가능한 것 같다”고 했다.

출판 불황에도 독서 저변 두터워

고려대의 미술 동아리 서화회 졸업생 모임도 함께 읽는다. 평소 자주 만나 술 마시던 이들은 2011년 그럴 바에야 책 읽고 술 마시자며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서양 고전소설, 이후 현대소설을 읽다 3년쯤 전부터는 ‘전작(全作)주의’ 독서를 실천한다.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 게 전작주의 독서다. 여섯 명 회원이 힘닿는 한 최대한 읽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논쟁으로 번질 정도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지금까지 섭렵한 작가가 82명. 실제로 읽은 책은 100권이 넘는다. 웬만한 세계문학 전집을 뗀 셈이다. 토목공학과 77학번인 양정수씨와 함께 모임의 공동 좌장 격인 건축과 77학번 이관직(비에스디자인 건축 대표)씨는 “세계문학을 읽다 보니 나라별 비교를 하게 되는데 역시 문학은 영국이 막강하더라”며 독서 내공을 내비쳤다.

해마다 독서인구가 줄고 출판불황이 갈수록 심각하다지만 실제 독서 행위가 이뤄지는 현장에서는 이처럼 통념과 다른 현상들이 벌어진다. 유튜브 책 소개 채널에 수만 명씩 구독자가 몰리고 민음사 등 출판사의 북클럽 회원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현상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다. ‘유료 독서모임’이라는 아이디어로 시장을 강타한 트레바리, 전자책 구독 모델도 통한다는 점을 보여준 리디북스·밀리의 서재 등 독서 관련 스타트업들의 성공담은 독서 지형도만 바뀌었을 뿐 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는 것 같다.

『마의 산』 원서 읽기 모임 같은 독서 동아리들이 흔해진 것도 예전에는 없던 모습이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의뢰를 받아 로이스컨설팅이 ‘전국 독서동아리 현황 조사설계 연구’를 수행한 결과 학교·서점·공공도서관 등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전국의 독서 동아리 숫자는 2만160개, 이를 토대로 추정한 실제 동아리 숫자는 3만8749개였다. 동아리 회원 수를 평균 10명으로 잡으면 전체 38만 명, 인구 1000명당 7명꼴로 독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는 얘기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사무처장은 “전문가들이 ‘구텐베르크 괄호 치기’라고 표현하는 일종의 전환이 일어나는 중인 것 같다”고 소개했다.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자기만의 책을 갖게 된 사람들이 골방에서 나홀로 독서로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는 현대적 상황 이전, 그러니까 구텐베르크 등장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동아리에서 함께 읽고, 북콘서트·북토크에서 저자를 직접 만나는 요즘 현상이, 활자 문명 이전 말로써 문학을 향유하던 구비문학 시대를 연상시킨다는 해석이다.

함께 읽어 좋은 점은 뭘까. 광진정보도서관 오지은 관장은 독서 동아리 활동을 할 경우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독서습관이 형성되고, 개별 독서보다 심층적 독서가 이뤄져 개인의 인식 폭을 넓힌다고 본다(‘독서 동아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발전방안 연구’). ‘읽기 중독자’를 자처하는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전국의 이름난 독서 동아리 취재기를 묶어 지난해 『같이 읽고 함께 살다』 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독서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들은 삶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럽게 타자의 인정과 수용을 바라는 쪽으로 발전하고 그로부터 개인은 물론 가족, 지역을 바꾸는 변화의 싹이 틀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의 예산·제도적 뒷받침 필요

1981년생 주부 강원임씨는 함께 읽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꾼 경우다. 학원강사로 활동하다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지내던 강씨는 어느 날 자신의 독서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주부 책읽기 모임을 결성한 게 2013년. 전문적인 독서토론 리더의 역할에 관심이 생겨 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지난해  『엄마의 책모임』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요즘 강씨는 외부 의뢰를 받아 보수를 받고 독서토론을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반짝거리는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독서 동아리의 수명은 짧은 편이다. 많이 만들어지는 만큼 많이 없어진다. 안찬수 사무처장은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제도적 뒷받침, 예산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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