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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모래 위에 지은 '반도체 집'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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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호 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SK가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개발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계열사를 통해 올해 안에 샘플을 만들어 공급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일본의 부품ㆍ소재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자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관련 기술의 개발에 나서는 움직임입니다.

일본의 소재ㆍ부품 수출 규제는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약한 곳을 치고 들어오자 국내 정보기술(IT) 산업의 취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에 전시된 반도체웨이퍼. 일본 정부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패널 핵심소재에 쓰이는 3개 품목에 대해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뉴스1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에 전시된 반도체웨이퍼. 일본 정부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패널 핵심소재에 쓰이는 3개 품목에 대해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242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 중 3분의 2가 소재ㆍ부품 관련 적자입니다. 한국이 정보기술 관련 업종을 중심으로 수출에 주력할수록 일본은 소재 부품 관련 산업으로 실익을 챙기는 구조입니다. 일본산 부품이나 소재가 없다면 한국의 주요 IT(정보기술) 제품 생태계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한일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기 때문에 글로벌 공급망(Supply Chain) 측면에서도 단단히 엮여 있습니다. 기업은 품질 좋고 싼 원자재와 부품을 조달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국내에 좋은 부품이나 소재가 있다면 문제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물류 측면에서 이점이 있는 주변국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부품 소재는 단기간에 개발하기 힘듭니다. 오랜 기간 인력과 자금을 투자해 기술을 축적해야 합니다.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한국 기업이 부품 소재 분야보다는 조립생산 위주의 완제품 쪽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이런 산업 구조는 거칠게 말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지어 경제 부총리나 산업자원부 장관이 새로 들어설 때마다 부품 소재 산업 육성을 강조했습니다만 결과는 늘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습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도체 소재 가운데 올 들어 5월까지 일본에서 수입한 소재의 비중은 43.9(불화수소)~93.7%(투명 폴리이미드)에 달했다. [중앙포토]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도체 소재 가운데 올 들어 5월까지 일본에서 수입한 소재의 비중은 43.9(불화수소)~93.7%(투명 폴리이미드)에 달했다. [중앙포토]

중소ㆍ중견 기업은 투자 기간이 길고 위험성이 큰 부품 소재 개발에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설령 개발했다고 해도 대기업이 사주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기 힘듭니다. 대기업도 할 말이 있습니다. 국내 중소기업이 생산한 제품의 품질이 떨어진다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까운 일본에서 품질 좋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데 굳이 한국 중소기업을 믿고 기다릴 이유가 없죠. 최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벌인 논쟁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엇갈린 시각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18년 전인 2001년 ‘소재ㆍ부품 전문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소재부품 특별법)’이 제정됐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더는 말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일본의 경제 공습을 통해 부품 소재 산업의 중요성을 국민이 인식하게 됐습니다. 필요한 건 실천입니다. 민간에 맡겨 두는 게 우선이지만 현재 한국 산업 구조에서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판을 새로 짜는 획기적인 그랜드 플랜입니다. 정부는 인프라를 깔아야 합니다. 산학연 협업이 가능하도록 장을 만들어 기술 개발을 위한 물꼬를 터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펀드 등을 조성해 기술 개발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기업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연구개발에 참여하도록 세제 혜택과 같은 지원책도 필요합니다.

정부 여당은 이번에 소재부품 특별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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