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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구 5단 '황산벌 결투'서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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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도전자 이영구 5단(右)이 고향인 논산으로 이창호 9단을 불러들여 필사의 반격을 노렸으나 이창호의 노련한 운영에 말려들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도전자 이영구 5단이 '황산벌'에서 이창호 9단과 맞섰다. 계백장군의 혼백 앞에서 결사항전의 각오를 다짐했다. 그러나 19세 이영구는 왕위 11연패를 노리는 천하제일 이창호 9단의 진격을 가로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09수만에 흑불계승. 스코어는 2대0으로 벌어졌고 이영구는 막판에 몰렸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이영구는 이제 모든 것을 불살라야 한다. 3국은 19일 한국기원에서 벌어진다.

충남 논산시엔 황산벌과 은진미륵이 있다. 황산벌이 이영구의 이미지라면 은진미륵은 이창호의 이미지다. 논산은 또 신흥강자로 떠오른 '야생마' 이영구 5단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국기원과 이영구의 고향 팬들이 논산대국을 만들어냈다. 1대0으로 뒤진 이영구가 이곳에서 반격을 개시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대국 전날인 11일, 두 대국자는 비가 쏟아지는 황산벌의 백제 군사박물관으로 가 계백장군 앞에서 악수를 나눴다.

12일 오전 10시, 논산시청에 마련된 특별대국실에서 서봉수 9단의 개시 선언으로 KT배 왕위전 도전2국이 시작됐다. 국면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모두들 이창호와의 장기전은 자살행위라고 말한다. 초반에 강수를 던져 판을 흔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백을 쥔 이영구는 좀체 자신의 펀치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초반, 상변에서 뼈아픈 실점을 하고 말았다. 이창호 9단이 그만큼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후 대국에서 유리한 이창호 9단이 몸조심하는 사이 이영구 5단이 바짝 따라붙는 듯 보였다. 장기전이고 계가바둑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이영구 5단이 빈틈을 보였고 이창호 9단이 그 틈을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승부는 여기서 한 방에 끝나고 말았다. 장사로 소문난 이영구 5단이건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배한 허망한 한 판이었다.

◆ 왕위전 이모저모

○…임성규 논산시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대국장과 공개해설장, 검토실은 인터넷과 비디오 시설이 완비된 시 청사에 차려졌다. 논산 기업인 회장인 이용훈씨, 논산 기림회장 최창익 병원장, 논산 최고수인 김동민 6단 등 논산 바둑팬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왕위전은 대성황을 이뤘고 이창호 9단은 가는 곳마다 기념촬영, 사인 등으로 바빴다. 시내 곳곳에 KT배 왕위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입회인은 대전 출신의 서봉수 9단이, 공개해설은 논산이 본적인 김성룡 9단이, 논산 지역 꿈나무들을 주 대상으로 한 지도 다면기는 이상철 8단, 김영삼 7단, 나종훈 6단이 맡았다. 충남 출신 고수로는 예산의 안조영 9단, 대전의 고근태 4단 등이 있다.

○…서울의 한국기원에선 후지쓰배 우승자 박정상 9단이 인터넷 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의 생중계를 맡았고 이세돌 9단, 강동윤 4단 등이 검토에 참여했다. 해설이나 검토는 시종일관 이영구 5단이 유리해지는 그림은 무엇일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박정상 9단은 "이창호 사범님은 아직까지 우리들의 공공의 적이라서…"라고 말했다. 이창호 9단이 올해 들어 몇 번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 젊은 강자들에게 이창호는 여전히 넘어야 할 마지막 장벽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하이라이트=너무 멀리 뛴 백?와 함께 수비를 소홀히 한 100이 최후의 패착. 이창호 9단이 101로 사활의 급소를 짚으며 정교하게 응징해오자 백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106까지 일단 우변을 살렸지만 107로 가르고 나오자 응수가 두절됐다. 장고를 거듭하며 대책을 강구하던 이영구 5단은 109를 보자 돌을 거뒀다(참고도1). 이후 백1로 찌르고 3으로 끊어도 흑4가 선수여서 헤어날 길이 없다(참고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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