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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멘토 하마다 “반도체 공동체 깨는 건 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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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가 한국을 찾아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환담하는 장면. 사진 뒷면엔 1986년 4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마다]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가 한국을 찾아 고 이병철 삼성 회장과 환담하는 장면. 사진 뒷면엔 1986년 4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마다]

일본 참의원 선거가 진행 중이던 지난 21일 오전 10시,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 입국장. 94세 일본인 노인이 한국서 오는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입국장에 들어서는 여성과 부녀(父女)처럼 반갑게 해후했다.

기술 자문했던 일본인 박사 인터뷰 #한국 반도체 일군 숨은 조력자 #“소재 일본, 생산 한국, 소비 미국 #분업 흔들면 인류 발전에 잘못 #갈등 표출된 지금 관계 개선 기회”

이 노인은 고 이병철 삼성전자 전 회장의 기술 자문 역할을 했던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1세대 원로들 사이에는 ‘한·일 반도체 산업의 가교(架橋)’ ‘한국 반도체 산업의 숨은 조력자’로 불린다. 여성은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개발 업무를 맡았던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이다.

중앙일보는 일본의 소재 수출 제한 조치에 대해 지혜를 모으기 위해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 양 원장과 동행해 하마다 박사를 단독 인터뷰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 친필로 싸인해 하마다 박사에게 선물했다. 왼쪽 아래는 88 올림픽 때 삼성으로부터 받은 티스푼 세트.

고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 친필로 싸인해 하마다 박사에게 선물했다. 왼쪽 아래는 88 올림픽 때 삼성으로부터 받은 티스푼 세트.

하마다 박사는 먼저 “기술 발전으로 인류의 삶이 크게 변화해왔는데 그 바탕에는 반도체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미·일로 나눠진 반도체 생산의 글로벌 분업구조에 대해 “반도체는 최고의 소재를 만드는 일본, 최고의 생산성을 확보한 한국, 가장 많이 소비해주는 미국이 함께 발전시켜 온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한·미·일의 IT와 소재·장비 산업이 ‘반도체 공동체’를 이뤄 함께 발전해왔다는 의미다. 하마다 박사는 “정치·외교적 갈등이나 역사적 감정이 어떻더라도 그 불똥을 반도체로 번지게 하는 것은 인류 발전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갈등이 한·일 뿐 아니라 국제 정세의 영향을 받는다는 견해도 내놨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장 이후 미국 우선주의가 확산하고 있는데 일본도 이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어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일본은, 바로 이웃이자 역사적, 지리적으로 가깝고, 동북아에서 거의 유일한 민주국가인 한국과 가까워져야 국제사회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며 “갈등이 표출된 지금이 오히려 양국이 관계를 개선할 기회”라고 말했다.

한국 소재 국산화, 반도체 품질 저하 우려

일본의 이번 조치가 경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갖고 있는 근본적 인식 차이를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강제징용 등에 대한 보상 문제에 대해 일본이 경제·산업적으로 복수를 해 온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 대부분은 (이번 조치를) 소재 수출의 안전성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양국민 간에 소재 갈등의 원인을 보는 시각차가 무척 크다는 의미다.

그는 “진짜 경제 전쟁이라면 (일본이 아예) 소재 수출을 중단했을 것”이라며 “(앞으로)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더라도 소재 수출은 하되 확인을 제대로 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조치가 참의원 선거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서도 “한국과 대치 국면을 조성하는게 일본에서 정치적으로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선거와 무관한 조치라는 시각이다.

그는 소재 수출 제한 발표 후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재 국산화 움직임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그는 “한국 입장에서 소재 국산화는 당연히 추구해야 할 방향이지만 국가와 기업이 손잡고 20~30년 뒤를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으로 할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급한 국산화가 ‘메이드 인 코리아’ 반도체의 품질 저하로 이어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고 했다.

이병철 “일본이 할 수 있는 건 한국도 할 수 있다”

그는 이어 “일본의 소재는 길게 보면 메이지 유신 때 서양 신문물을 받아들인 후 150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과 기술로 국산화한 것”이라며 “다른 나라들이 소재 국산화 과정에서 어떤 연구소를 만들고, 정부 자금은 어떤 분야에 어떤 방식으로 투입해 성과를 높였는지를 참고하면 한국의 소재 국산화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향자 "국가 R&D 장기적 안목 필요”

이에 대해 함께 있던 양 원장은 “반도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소재가 들어가는 데 이를 모두 국산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국제 분업 형태로 발전해 온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번 갈등이 한국 기업과 산업계에 소재 국산화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며 “국가 연구·개발(R&D) 예산과 역량을 단기 성과가 아닌 장기적 안목으로 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건 소득”이라고 설명했다. 양 원장은 “현재 20%대인 반도체 소재·장비 국산화율을 빠른 시일 안에 60%까지는 끌어올려야 안정적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날 A4 용지 두장에 본인이 생각하는 갈등 원인과 해법을 정리해 양 원장에게 전달했다. 그는 해법으로 일본 정부는 세계 질서 재편 속에서 이웃 국가인 한국에 대한 입장을 정할 것, 소재의 전용이 의심스럽다면 어떤 부분이 우려스러운지 명확히 밝힐 것 등을 주장했다. 한국 정부에는 반일 감정을 자극해 역사 문제가 경제 문제로 번지지 않도록 신중할 것, 페이퍼 워크(서류 작업)을 통해 수입 소재와 용도를 명확히 밝혀줄 것을 제안했다.

그는 “경제 분야, 특히 반도체에 있어서는 국제 분업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본의 전문가들도 일치된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다”며 “해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역사적 문제로 양국이 경제·산업적으로 함께 타격을 입는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회장, 하마다 박사에 전용 헬기 선물

하마다 박사는 일본 도쿄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통신회사 NTT의 기술이전을 담당하던 회사 N텍에 근무했다. 전무 시절이던 1980년대 초반 삼성전자에서 신기술을 강연한 게 계기가 돼 한·일 반도체 협력의 산파 역할을 했다.

하마다 박사는 15살이나 많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을 큰 형님처럼 모셨다. 최신 기술 흐름에 목말랐던 이 전 회장에게 하마다 박사는 기술 어드바이저 역할을 했다. 하마다 박사는 “삼성전자의 부장, 과장들과는 기술 개발의 실무적 대화를 많이 했지만, 고 이병철 회장과는 세계 기술의 흐름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회고했다. 한국을 자주 찾는 하마다 박사에게 이 전 회장은 하마다 박사만을 위한 전용 헬기도 선물했다고 한다. 하마다 박사는 “헬기를 내주던 날 회장님이 ‘아주 안전한 헬기’라고 소개하며 먼저 올라 탔다. 함께 타고는 지방 공장을 시찰했다”고 소개했다.

하마다 박사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계기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이 전 회장은 ‘소니, 도시바 등 일본의 전자 산업이 왜 세계 최강인지를 늘 궁금해했다. 그 바탕에 트랜지스터 기술이 있다는 설명을 드리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마다 박사는 ’한국이 반도체를 할 수 있겠느냐‘는 주변 우려가 커지자 이 전 회장이 “일본인이 할 수 있는 건, 한국인도 할 수 있다”고 답했다는 일화도 들려줬다.

도쿄=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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