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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in] "죽느냐 사느냐' 연극계 … "공연기획은 예술 ? 연극 외판원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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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공연기획사 투비컴퍼니의 직원 장경철(25)씨. 그는 오늘도 '연극 장사'를 하러 서울 곳곳을 누빈다. 이제 입사 2년차. 처음엔 공연 기획이라고 해서 품위있고 고상할 줄 알았다. "이렇게 험할 줄 알았다면 꿈도 꾸지 않았다. 영락 없는 '연극 외판원'"이란다. 그는 오늘도 열심히 발품을 판다. 분투하는 그의 하루를 따라가 봤다. 공교롭게도 '물 폭탄, 시위 폭탄'으로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던 12일이었다.

#초반부터 삐걱 삐걱

전단지도 넣고 팸플릿도 꼬깃꼬깃, 할인 티켓도 빠뜨려선 안 된다. 아침에 꽉 찬 가방, 저녁엔 빈 가방으로 돌아올까.

장씨가 대학로 사무실에 출근한 시간은 아침 9시. 새벽부터 퍼붓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군인도 비가 오면 실내에서 일한다는데, 혹시 꾀가 나지 않을까? "이런 날 찾아가야 효과 직방입니다. 비를 뚫고 갔는데 문전박대할 만큼 독한 사람 많지 않죠."

오늘 홍보할 작품은 창작 뮤지컬 '키스 미 타이거'와 성교육 뮤지컬 '엄마는 안 가르쳐줘'. 창작 뮤지컬은 대학교가 주 타깃이고 성교육용 작품은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가 공략 대상이다. 최대한 단체 관람을 유도해야 한다. 오전은 홍익대-연세대, 점심 무렵엔 외대-경희대-고려대, 오후엔 영등포 일대 유치원 등으로 동선을 짰다. 포스터 50장.전단지 200장.팸플릿 200장 등 준비물도 충분히 챙겼다.

오전 10시 출격.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사이 벌써 사고가 났다. 두 손에 검은 가방과 우산, 쇼핑백을 한꺼번에 들고 가다 보니 쇼핑백이 젖어 찢어졌다. 와이셔츠도 축축해지고, 신발에도 물이 꽉 찼다. "오늘 일진 불안한데…."

273번 버스를 타고 홍익대 앞에 내렸다. 첫 번째 만날 사람은 '연극의 이해' 교양 과목을 가르치는 강사님. 이미 약속을 잡은 상태. 웬걸, 연구실에 들어가니 보이질 않는다. 서둘러 휴대전화 연락. "아- 그랬었나요. 어쩌죠, 저 지방에 내려와 있는데." 시작부터 허탕이다.

#점심은 건너뛰고

이렇게 물러날 순 없다. 이제부터 '홍익대 도배질'이다. 대학교 이곳 저곳에 포스터와 전단지를 붙이고 뿌리기 시작했다. 학생회관.대학본부.게시판 가리질 않는다. 간 김에 '극예술 연구회'도 들렸다.

라면을 끓여먹는 두 학생. "주룩주룩 비도 오는데 뜨끈한 라면 국물 죽이죠." 괜스레 너스레를 떤다. 시큰둥한 반응. 들고 있던 포스터가 무거운 척 테이블에 내려 놓는다. "무슨 공연 하시나 봐요?" 이때가 타이밍이다. "뮤지컬 좋아하시죠. 요즘 창작 뮤지컬도 꽤 때깔있게 나와요." 젊은 세대 감각이 묻어난다, 라이선스에 비해 한국적 정서에 맞다 등 호기심 당길만한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팸플릿도 건네고, 동아리 벽에 포스터도 붙였다. 이 정도면 성공!

연세대를 거쳐 예정에 없던 서강대까지 샅샅이 훑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1시30분. 점심은? "대학이 대개 4시 넘으면 사람들 없어요. 그 전에 다니려면 점심 거르기 일쑤죠."

#야속한 인터폰

다음 지점은 외대. 버스를 탔는데 광화문 시위로 꼼짝 달싹 못한다.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일정이 계속 어긋난다. 오늘 영등포 지역은 포기하고, 외대 부근 유치원과 학교를 닥치는 대로 공략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외대를 거쳐 경희대까지 걸어가는 사이 눈에 들어온 유치원 두 곳을 들렸다. 첫 번째 유치원에선 나름대로 호의적인 반응. 근데 두 번째는 입구부터 걸린다. "아저씨, 누구세요? 약속했어요." 경비실에서 외판원 취급을 한다. 가까스로 인터폰으로 원장님과 연락이 닿았다. 2분이면 충분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냉랭하다. 경비실에 팸플릿을 맡기고 돌아설 수밖에.

경희중학교를 들렸다가 연극부가 없다는 말에 돌아섰다. 7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헤맨 끝에 경희대 연극반에 가 보니 아무도 없다. 문 밑으로 팸플릿을 밀어 넣고 나왔다. 계속 헛손질이다. 시간은 이미 5시. 이러다 들고 온 자료 반도 못 쓸판. 시간에 쫓겨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10여 곳 방문,

2만보는 족히 걸어

벌써 방문한 곳만 10곳이 훌쩍 넘고, 걸음걸이로도 2만보는 족히 될 듯 싶다. 왜 이렇게 고생을 할까. "대학로는 돈이 없잖아요. 몸으로 때울 수밖에요. 그리고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라도 사람 직접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은 마케팅은 없어요."

연극영화과를 휴학 중인 그도 본래는 연극 배우를 꿈꿨다. 우연히 '젊은 연극제'를 준비하다 공연 기획에 눈을 떴다. "공연 기획은 온 세상이 무대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관객이나 마찬가지죠. 이렇게 고생해서 올린 연극을 보면 내 새끼 같아 매번 눈물이 나요."

고려대까지 돌고 나온 시간은 오후 6시. 한결 가벼워진 가방, 그래도 장씨는 못내 아쉬운 눈치다. "자료를 다 돌리고 온 날은 마치 매진 기록 한 것처럼 뿌듯해요. 내일이요? 또 돌아야죠. 더 뻔뻔하게, 더 날렵하게."

최민우 기자, 신지원.안경원 인턴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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