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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양 4연패를 보는 두 시각…실력인가 약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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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 중국 쑨양(가운데). 호주 호튼(왼쪽)은 도핑 의혹에 대한 항의로 시상대를 거부했다. [AP=연합뉴스]

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 중국 쑨양(가운데). 호주 호튼(왼쪽)은 도핑 의혹에 대한 항의로 시상대를 거부했다. [AP=연합뉴스]

중국 수영 스타 쑨양(28)이 21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사상 최초로 남자 자유형 400m를 4회 연속 우승했다. 그런데 이 대기록과 쑨양의 도핑 관련 스캔들이 동·서방 세계의 반목을 불러왔다. 세계 수영계에 흐르는 ‘신냉전’ 기류다. 2016년 리우 여름올림픽 당시에도 수영에서는 미국·유럽·호주 대 러시아·중국의 대결 양상이었다. 이번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대결 상대는 미국·호주 대 중국으로 좁혀졌지만, 갈등은 더 깊어졌다.

중국과 호주 때 아닌 약물 전쟁 #2014년 도핑 적발, 중국 당국 감춰 #쑨양, 지난해 혈액 샘플병 깨뜨려 #시상대 거부한 호튼에 선수들 지지

도핑 전쟁의 ‘직접적 증거’는 쑨양이다. 쑨양은 2014년 5월 도핑검사에서 금지약물인 트라이메타지딘에 대한 양성 반응이 나와 3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중국 당국은 그 사실을 꼭꼭 숨겼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그 사실이 알려졌고, 쑨양은 논란의 인물로 떠올랐다. 호주 수영선수 맥 호튼(23)은 리우올림픽 당시 쑨양을 “약물 사기꾼(Drug Cheat)”이라고 비난했고, 보란 듯이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쑨양은 은메달에 그쳤다.

세계수영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사상 처음 4회 연속 우승한 쑨양이 물을 내리치며 포효하고 있다. [뉴스1]

세계수영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사상 처음 4회 연속 우승한 쑨양이 물을 내리치며 포효하고 있다. [뉴스1]

분노한 중국 팬들은 호튼의 소셜미디어에 10만 개가 넘는 비난 댓글을 달았다. 중국수영연맹은 호튼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호주 대표팀이 이를 거부했다. 중국과 호주 언론까지 설전에 가세했고, 중국 대 호주의 장외 전쟁이 돼버렸다. 당시 러시아는 대규모 도핑 스캔들로 100명 넘는 선수가 올림픽에 불참했다. 미국·유럽이 중국·러시아에 대한 비판에 가세하면서 동·서방간 대결로 일이 커졌다.

리우올림픽 이후 잦아들었던 동·서방간 싸움이 다시 시작된 건 역시 쑨양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국제수영연맹(FINA) 위임을 받은 국제도핑시험관리(IDTM) 직원들이 쑨양의 중국 집을 방문해 검사 샘플을 수집하려 했다. 쑨양은 혈액이 담긴 검사용 유리병을 망치로 깨뜨렸다. FINA는 “검사 절차에 일부 문제가 있었다”며 쑨양에 대해 가벼운 경고 처분 징계만 내렸다.

미국·호주의 수영 관계자들은 이번 대회에 버젓이 참가한 쑨양을 향해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리우올림픽 여자 평영 100m 금메달리스트 릴리 킹(22·미국)은 “혈액이 담긴 유리병을 깨뜨린 사람은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호주 경영 대표팀 자코 베르하렌 코치는 “쑨양의 사례는 도핑 방지 시스템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 쑨양이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우승했다. 그는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은 뒤 두 팔로 물을 치며 포효했다. 경기장을 찾은 수십 명의 중국 팬이 환호했다. 은메달을 딴 호튼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쑨양이 무슨 행동과 말을 하든 나는 할 말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시상식에서 쑨양과 함께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 메달리스트 기념 촬영 때도 쑨양과 거리를 뒀고 웃지 않았다. 이에 대해 쑨양은 “내게 불만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에 나왔다. 쑨양 개인을 무시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중국은 존중해야 한다”고 호튼을 비난했다.

호주 수영 선수 맥 호튼을 비난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댓글. [사진 맥 호튼 SNS]

호주 수영 선수 맥 호튼을 비난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댓글. [사진 맥 호튼 SNS]

호튼의 소셜미디어에는 22일에 하루에만 13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중국 네티즌의 비난 글이었다. 하지만 대회 출전 선수들은 호튼을 지지한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릴리 킹은 “21일 밤 선수촌 식당에 호튼이 나타나자, 자리에 있던 수십 명의 선수가 벌떡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모두 호튼의 행동을 지지했다. FINA의 그 누구도 (도핑에 깨끗한 선수를) 대변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서방 여론도 호튼 쪽이다. 22일 게재된 시드니 모닝헤럴드의 ‘쑨양과 시상대에 함께 오르기를 거부한 호튼’ 기사에는 200여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호튼을 지지하는 내용이다. 영국 BBC, 미국 워싱턴 포스트 등도 호튼의 행동을 자세히 보도했다.

21일 광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남자 자유형 400m 시상식 후 쑨양과 기념 촬영은 거부했지만, 동메달을 딴 이탈리아의 가브리엘레 데티와는 환하게 웃으면 사진을 찍고 있는 맥 호튼(왼쪽). [AP=연합뉴스]

21일 광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남자 자유형 400m 시상식 후 쑨양과 기념 촬영은 거부했지만, 동메달을 딴 이탈리아의 가브리엘레 데티와는 환하게 웃으면 사진을 찍고 있는 맥 호튼(왼쪽). [AP=연합뉴스]

3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중국 언론이 잠잠하다. 리우올림픽 당시 중국 언론은 “쑨양이 심장이 안 좋아서 치료 목적으로 약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옹호하는 보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혈액 병을 깨는 등 검사를 방해했다. 도핑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그래서인지 중국 언론은 특유의 호전적 맞대응 대신 침묵하는 분위기다. 21일 쑨양 기자회견에서 중국 취재진은 도핑 관련 질문이 나올까 봐 외국 취재진 눈치를 살폈다.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사 기자가 도핑에 관해 묻자 중국 취재진 표정이 굳어졌다. 중국 신화통신은 쑨양의 도핑 관련 언급을 전했지만, 쑨양이 비판받는 이유는 다루지 않았다.

쑨양도 이번 대회에서만큼은 도핑 테스트를 회피할 수 없다. 일단 21일 제출한 도핑 샘플에 대한 테스트 결과는 23일 나올 예정이다. 다만, 테스트 결과는 대회 조직위에 공개하지 않고 FINA에만 전달된다. 금지약물에 대한 양성 반응이 나올 경우 메달을 박탈당한다.

광주=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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