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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이끌던 책의 힘 시들…출판 아닌 ‘지식의 위기’ 심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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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호 19면

한국 사람들은 책을 점점 안 읽는다. 국제적으로도 그렇다. 지난해 1년간 교과서·만화 등을 제외한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연간독서율)이 OECD 평균보다 낮았다. 독서에 대한 체감 냉기는 더 썰렁하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라. 앙상한 독서율 통계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이런 독서 위기 상황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 기관이다. 출판 산업을 지원하고 독서 열기를 띄우기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이다. 지난해 7월 취임해 꼭 1년을 맞은 진흥원 김수영 원장을 만났다. 그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지냈고 로도스 출판사를 직접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출판 실물을 잘 안다는 평가다. 하지만 “관에 들어와 보니 출판 위기가 예상보다 심각했다”고 했다. “책의 위기일 뿐 아니라 국가 지식관리 체계의 위기”라는 표현까지 썼다.

김수영 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 #중·고·대학 독서 부재 놀랄 정도 #지식 순환 안 되고 책 덜 만들어 #책이 공동체 성장의 핵심 되도록 #국가 차원 지식관리 전략 필요

종이책이 위축되는 가운데 전자책 수요는 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용산역 전자책 체험홍보관을 찾은 출판문화산업진흥원 김수영 원장. ’전자책 확산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고 했다. 전자책 체험홍보관은 6~19일 열렸다. 신인섭 기자

종이책이 위축되는 가운데 전자책 수요는 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용산역 전자책 체험홍보관을 찾은 출판문화산업진흥원 김수영 원장. ’전자책 확산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고 했다. 전자책 체험홍보관은 6~19일 열렸다. 신인섭 기자

대통령 직속 ‘비상대책위’ 만들어야

진흥원에 들어와 보니 어떤가.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다. 민간에서 발생하는 출판 산업 수요와 국가의 정책 수요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게 진흥원의 역할이다. 양쪽 모두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민과 관이 잘 만나게 해야 하는데 해보니 간단치 않은 일이다. ”
한국의 출판 시장이 다르게 보이나.
“보다 큰 틀에서 한국 출판의 위기를 바라보게 됐다고 할까. 사실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에 몰두하면서 이전보다 텍스트를 더 많이 읽는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출판 위기의 본질은 책의 지위가 약화된 상황인 것 같다. 예전에는 책이 사회적 의제를 이끌어나갔다. 가령 1970년대나 80년대에 대해 알아보려면 당시 베스트셀러가 뭐였는지가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화두의 하나였다. 당대의 고민을 알 수 있었고 책에는 사회의 담론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힘이 현저히 약해졌다. 책의 위기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담론 형성의 위기이고, 지식이 처한 위기다.”
출판물이 사회의 의제를 이끌었던 과거 사례로 어떤 게 있나.
“1970년대 말 엇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나온 조세희의 연작소설집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는 이전까지 금기시됐던 노동과 자본의 현실, 해방공간에서의 민족운동사 등 민감한 부분들을 건드려 진지하고 치열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읽혔다. 이후 민주화라는 사회적 움직임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이 처한 위기의 원인은 무어라고 생각하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비슷한데, 사람들이 책을 예전보다 안 읽으니까 지식 순환이 안 되고, 그러다 보니 책이 더 안 만들어진다. 지식에 관한 우리의 국가적 관심은 너무 생산 측면에만 쏠려 있는 것 같다. 학술 진흥을 위해서 대학들에 광범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나. 그러다 보니 그렇게 생산된 지식들이 어떻게 확산되고 공유되어야 하는지, 우리 사회 전체의 교양 수준 제고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 같다. 요즘 지식을 생산하는 역할은 더 이상 대학이 독점하고 있지 않다. 조금 결이 다른 활동가들이 책을 쓰고 강연에 나선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SNS를 통해 이슈가 확산되고 사회적 의제가 정해지는 경우도 많다.
“SNS에 표출되는 다양한 의견들도 잘 다듬어져 의제를 설정하는 논의의 장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SNS가 중심이 된 여론이나 의제 형성 과정에 문제가 생긴다면 결국 무게감 있는 지식이 생산돼 공유되는 환경을 만들어 풀어나가야 할 텐데, 이는 단순히 출판사 몇 개를 살리거나 매출을 늘려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출판산업 차원에서의 접근도 필요하지만 지금 당장 국가적으로 지식의 위기를 선언하고 관계 부처 담당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해결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가장 시급한 교육 현장의 독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부가 나서야 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법무부, 경제부처도 참여해 국가적인 지식의 위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체의 의제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국가 위기를 선언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고 보나.
“초등학교는 사정이 좀 다르지만 중·고·대학교는 문제다. 깜짝 놀랄 정도로 학생들이 책을 안 읽는다. 대학교의 교내 서점이 사라지고, 수업이 PPT로 이뤄지다 보니 학생들이 책을 더 안 읽는다. 독서에 관한 한 교육과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본다. 독서의 위기는 어떤 사람이 일부러 밥을 안 먹는 상황과 비슷한 거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민주주의를 일구고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열심히 공부하고 책 읽었기 때문 아닌가. 실제로 댐에 구멍이 났을 때 위기를 선언하면 그건 의미가 없다. 댐이 무너지기 전에 구멍이 곧 뚫릴 것이라 예상하고 이를 막기 위해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야 한다.”
결국 여러 부처가 참가하는 위원회 같은 걸 만들자는 얘기인가.
“국가적인 지식관리 종합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관련 기구나 대통령 직속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게 만들어진다면 더 좋긴 할 것 같다. 국가지식재산위원회나 한국지식재산연구원 같은 기존 조직들은 아무래도 지식 생산자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쪽에 치우친 느낌이다. 국가지식관리전략위원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지식의 생산·보호·유통·공유·소비 과정을 아우르도록 해 책이 문화의 핵심일 뿐 아니라 공동체 성장전략의 핵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책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자는 거다. 4차 산업혁명 시대와도 잘 들어맞으리라고 본다.”

출판유통통합시스템 연말까지 개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진흥원의 독서 진흥 프로그램은 어떤 게 있나.
“차상위계층 초·중학생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북토큰 사업과 공공도서관·문화원 등에서 열리는 인문독서아카데미를 주요 사업으로 꼽고 싶다. 북토큰은 2500개 학교 청소년 7만3000명에게 도서교환권인 북토큰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사전에 선정한 도서를 북토큰과 바꿔 양질의 도서를 읽도록 하자는 취지다. 인문독서아카데미는 인문학 관련 교수와 강사들을 85개 공공도서관 등에 파견해 인문학 강의를 하고 관련된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강의와 독서를 결합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을 늘려나가려고 한다.”
올해 진흥원의 역점 사업을 꼽는다면.
“출판유통통합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 중요하다. 도서 판매 시점에 재고 물량, 위치 정보 등이 자동으로 파악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에 출판사, 도매상과 서점 등이 얼마나 참여해 자신들의 정보를 공개하느냐가 사업 성공의 관건인데, 의미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참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누가 운영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일었던 세종도서 문제는 출판사·도서관·독서운동과 관련된 분들이 운영위원으로 참가하는 운영위를 구성해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리됐다. 우수 도서를 선정해 구입한 다음 도서관에 보내는 세종도서 사업은 출판사와 도서관, 독자를 한꺼번에 모두 지원하는 공공성이 강한 사업이다. 여러 이해 당사자들의 요구 사항을 얼마나 잘 청취해 합리적인 수준에서 반영하느냐가 중요하지 누가 운영 주체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판단한다. 전자책과 오디오북 지원을 늘리고, 학교·지자체·도서관과의 협력을 강화해 독서 운동을 확산시키려 한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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