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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 최저임금 반발 잠재운건 'EITC'···한밤 타결 막전막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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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2.9% 오른 시간당 8천590원으로 결정됐다.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실에 2020년 적용 최저임금안 투표 결과가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2.9% 오른 시간당 8천590원으로 결정됐다.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실에 2020년 적용 최저임금안 투표 결과가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내년에 적용될 최저임금이 시간당 8590원으로 결정됐다. 올해(시급 8350원)보다 2.87% 오른 금액이다. 2010년 이후 11년 만에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월급 179만5310원, 연봉 2154만3720원…415만명 영향

최저임금위원회는 1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제13차 전원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주휴 수당을 포함한 실질 시급은 1만318원이다. 월급으로 따지면 179만5310원, 연봉 2154만3720원이다. 고용노동부는 "이번에 의결된 최저임금안의 영향을 받는 근로자는 137만∼415만명, 영향률은 8.6∼20.7%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날 최저임금위 공익위원들은 근로자 위원과 사용자 위원에게 "현실적인 수정안을 내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사용자 위원은 시급 8590원을, 근로자 위원은 8880원을 써냈다. 두 안을 놓고 표결에 부쳐 사용자 안 15표, 근로자 안 11표, 기권 1표가 나와 사용자 안으로 의결됐다. 전날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된 마라톤 회의가 13시간 만에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동결 아쉽지만 불가피한 선택" vs "최저임금 참사" 

사용자 위원들은 "동결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쉽다"며 "그러나 큰 폭의 인상으로 초래할 각종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번 결정이 경제활력을 제고하고, 중소·영세 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을 다소나마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반면 노동계는 "참사"로 표현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논평을 통해 "최저임금 참사가 일어났다"며 "(현 정부의 공약인)노동존중 정책, 최저임금 1만원 실현, 양극화 해소는 완전 거짓 구호가 됐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도 "경제공황 상황에서나 있을 법한 실질적인 최저임금 삭감 결정"이라며 "최소한의 기대조차 짓밟힌 분노한 저임금 노동자와 함께 노동 개악 분쇄를 위해 총파업을 포함한 전면적인 투쟁을 조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문 대통령 공약 이행 사실상 어려워져

당초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에 대해 동결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기도 했다. 정부와 여당의 움직임도 그랬다. 문재인 대통령조차 지난 5월 KBS와 대담에서 "공약에 얽매여 무조건 그 속도대로 인상돼야 한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최저임금이 결정된 직후 이미 "2020년까지 1만원 목표는 사실상 어려워졌다"고 말했었다.

이로써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시급 1만원) 실현은 사실상 무산됐다. 공약을 실현하려면 현 정부 남은 임기 2년 동안 심의에서 각각 7.9%를 인상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주휴수당을 포함하면 공약, 이미 실행 시각도

그렇다고 완전히 공약을 어겼다고 보기도 힘들다. 주휴 수당을 포함한 실질 시급은 이미 올해 1만30원으로 공약을 실현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질 시급은 내년에 288원 더 오른다.

더욱이 최저임금은 1988년 도입된 이해 한 번도 동결된 적이 없다.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9~99년 8월 적용분도 2.7% 인상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휘청이던 2010년에는 2.75% 올랐다. 내년 최저임금은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인상률이다.

역대 세번째 낮은 인상률…"덩치가 커져 인상 금액은 적지 않아"

하지만 금액으로 따지만 98년에는 40원, 2010년 110원 올랐다. 올해는 240원 인상됐다. 익명을 요구한 공익위원은 "2년 동안 많이 올라서 최저임금의 덩치가 커졌기 때문에 인상액으로 따지면 적은 액수가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 정부 들어 올해까지 29.1% 올랐다. 이번 인상으로 현 정부에서 32.8% 오르게 됐다. 현 정부 내에서 인상률만 놓고 보면 결코 낮은 인상률 아닌 셈이다.

업종·규모 차등 적용 문제, 조만간 논의 착수할 듯

그렇다고 소상공인의 어려움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올해 6월 기준으로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던 자영업자는 1년 전보다 12만6000명이나 줄었다. 이들이 고용한 사람은 대부분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다. 자영업자의 어려움이 근로자에게로 퍼졌다는 얘기다. 소상공인이 업종·규모별 차등 적용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다. 이 문제는 추후 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위도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해 이달 중으로 전원회의를 열어 안건으로 다룬 뒤 곧바로 논의에 들어갈 방침이다. 이를 둘러싼 2차 노사 격돌이 불가피하다.

소상공인 입장에선 더 오르면 견디기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심의에 참여한 소상공인(2명)조차 찬성표 던진 것은 이번에 결정된 최저임금이 나름대로 각종 경제 상황을 반영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공익위원은 "적정임금상승률과 근로장려세제(EITC)의 임금 보전성을 고려해 최저임금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기준으로 삼는 게 근로자·기업 모두에 적절"

한국노동연구원은 "생산성 임금제가 노사 모두에게 중립적이다. 적정임금상승률은 국민경제생산성으로 측정된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대체로 조응하여 움직인다"고 각종 논문을 통해 지적했다. 근로자에게 생산성 증가에 기여한 만큼 적정하게 보상될 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 저하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2017년 3.3%, 2018년 3.6%였다. 공익위원들은 여기에 EITC 정책을 접목했다. 그래서 도출한 적정한 인상 마지노선을 2.99%로 봤다. 그런데 사용자 위원이 이보다 10원 낮은 금액을 써냈고, 그 금액에 공익위원들이 표를 던졌다.

노동계의 생계비 논리, EITC가 잠재워

특히 EITC는 근로자 위원의 논리를 희석했다. 근로자 위원은 생계비 개념을 거론했다. 비혼 단신 노동자의 생계비가 201만4천955원이라는 통계를 제시하면서다.

EITC 일을 하지만, 소득이 적은 근로자와 사업자 가구에 세금을 돌려주는 형태로 국가가 소득을 보전해주는 제도다. 지금까지는 1300만원 미만(단독가구)~2500만원 미만(맞벌이가구)일 경우 최대 250만원을 지원했다. 이게 올해 9월부터 2000만원 미만~3600만원 미만으로 확대된다. 지원액도 300만원으로 늘었다. 최저임금이 고용주에게 소득분배의 책임을 떠넘긴다면 EITC는 정부가 직접 근로자에게 지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최저임금 인상 대신 EITC 확대를 꾸준히 권고해왔다. 시장을 교란하는 정책 대신 국가의 책임성을 강화하라는 뜻이다.

EITC의 확대가 노동계의 생계비 논리를 잠재우기에 가장 강력한 변수였던 셈이다.

파행 계속…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논란 재점화 가능성

남은 과제도 수두룩하다. 업종·규모별 차등적용 문제 이외에 최저임금 결정구조에 대한 논란도 재점화될 가능성도 있다. 올해도 심의 과정에서 노사 양측의 보이콧 등 파행이 계속된 만큼 결정 구조 개편 논의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류기정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내년 최저임금이 결정된 뒤 "노사 교섭 방식으로 결정하는 현 최저임금 결정구조에선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고, 무조건 올려야 하는 불합리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선 경제와 근로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안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전문가로 구성된 구간설정위원회에서 인상 범위를 제시하면 노사와 공익으로 구성된 결정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하는 이원화하는 방식이다. 전문가로 구성되는 공익위원 선정방식도 '노사 추천→노사 상호배제+국회 추천'으로 바뀐다. 그동안 고용노동부 장관이 행사하는 정부 단독 추천권이 폐지되는 셈이다. 또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반드시 경제 사정과 고용상황, 사회보장 급여 등을 결정기준으로 삼도록 했다.

이재갑 고용부 장관은 "결정체계를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했다"며 "개정안은 노사 단체를 포함한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수렴하고, 국제노동기구(ILO) 권고와 외국의 제도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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