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음치불가] 이은하 … 넉넉한 배기량 + 강한 폭발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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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성량이 크다고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니다. 목소리 큰 음치는 세상에 널려 있다. 그들은 노래방에 가면 마치 움직이는 대용량 스피커처럼 다른 이의 고막을 고통스럽게 자극한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공명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토크는 무시한 채 배기량만 크다고 차의 성능이 좋은 것이 아니듯, 소리의 공명을 잘 활용할 줄 알면서 '토크빨' 강한 폭발력과 넉넉한 배기량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럽고 큰 울림이야말로 대형 가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1973년 '님마중'으로 데뷔해 '밤차''아리송해''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봄비'등 많은 히트곡으로 70~80년대 폭발적 인기를 누린 이은하는 위의 특성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대형 가수다.

이은하는 허스키 보이스를 대표하는 여성 보컬이다. 하지만 허스키 창법에 흉성을 덧입혀 당시 여성 보컬로서는 드물게 매우 굵은 음색과 풍부한 소리를 연출했다. 보컬 창법이 과학화되기 이전인 70년대에 이미 이은하는 복식호흡법을 비롯한 호흡과 발성 등 기초적이고 중요한 노래의 기본기를 확실하게 갖춘 재원이었다. 노래 마디마다 맛을 살려내는 감정주입 능력과 때론 남성의 파워를 능가하는 노래 스타일은 당시 한국 여가수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저-중-고음역 등 소리의 전 영역을 고르게 잘 구사하는 흠잡을 데 없는 밸런스 감각도 주목할 부분이다. 특히 흉성적 허스키 창법을 구사함에도 저음뿐만 아니라 고음의 톤도 예리하게 잘 빠져나가 이 분야 창법을 익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본보기다. 짙은 허스키의 소유자임에도 소리에서 탄력이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디스코 타입의 경쾌한 댄스에서 애절한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고 파워풀하면서도 구성진 이은하의 노래는 '부르는'게 아니라 '되씹고 음미하는'차원에 올라 있다.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게 아니라 입안에서 갖고 돌리며 '당길' 줄도 알았던 탁월한 노래꾼인 것이다.

이런 대형 가수가 한때 'TV에 나올 수 없는 얼굴'이라는 모욕을 받았다는 것은 국내 음악계의 비극이고 수치다. 노래의 기본도 안 된 상태에서 단지 외모만 앞세워 스튜디오 녹음을 해 가수로 데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현 세태에서 30년 가까이 된 지금 이은하의 노래는 '구관이 명관'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노래는 현재 최상의 가창력을 구사하는 그 어떤 가수에도 뒤지질 않는다. 테크닉이 아닌 감성이 살아 숨쉬는 소리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지금보다 나은 감도 있다. 국내 음악계가 여전히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조성진 음악평론가·월간지 '핫뮤직'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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