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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장규칼럼

한·미 FTA의 '묘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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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려했던 대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로 나라 전체가 홍역을 치르게 생겼다. 점점 험악해져 가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FTA 추진을 찬성하는 쪽인데, 요즘 같아서야 마음 놓고 찬성한다는 말도 못 꺼낼 분위기다. 총리를 비롯해 장관들도 급기야는 말꼬리를 슬슬 내리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서 추진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강조하기보다는 '무리한 추진은 않겠다'는 쪽에 비중을 둬서 면피하기에 급급한 눈치다.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나도 크게 나게 생겼다.

국민에게 협상을 서두른다는 인상을 준 것은 정부 잘못이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면 국민한테 충분히 설명했어야 했고,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뒤늦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별도 대응팀을 만들어 국내 의견을 수렴, 홍보하고 문제점을 점검하도록 지시한 것은 잘한 일이다.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너무 소홀했다.

그러나 정부가 아무리 FTA 준비에 미진했다 해도 요즘 같은 분위기는 곤란하다. 과연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인가를 의심케 한다. 내 편 네 편으로 쪼개져 원수처럼 등질 것 같은 분위기다. 지금부터라도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토론이 시작돼야 한다. 서둘러야 하는 형편이라면, 그럴수록 토론의 횟수와 시간을 늘려서 밤샘을 해서라도 따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려진 결론이 FTA 반대라면 당연히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은 전혀 토론의 분위기가 아니다. 공청회조차 연거푸 무력 제지로 무산됐다. 토론이 격해진 나머지 멱살잡이를 하는 게 아니라, 회의장에서 말싸움으로 붙어보기도 전에 플래카드를 들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술 더 떠서 FTA라는 경제협상 이슈를 도덕적 문제로까지 비약시킨다. 경제적 득실을 냉철히 따지기 앞서서 '찬성하면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간다. 노조와 시민단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들고 일어서 반대를 외친다. 아무리 결사반대를 해도 최소한의 절차가 있는 법이고, 말로 하다 하다 안 될 때 몸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처음부터 논쟁을 뛰어 넘어 시위와 몸싸움으로 치닫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민망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국회의원님들이다. 한국경제의 장래를 고민하는 국가지도자라면 찬성이든 반대든 진작부터 FTA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어야 마땅하다. 행정부의 소홀을 견제하고 일깨우는 일 역시 국회의 몫이다. 하지만 여당이든 야당이든 FTA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진정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FTA의 찬반이 자신들의 직업 연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급급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상대국과 협상을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협상 내용을 공개하라는 상식 이하의 주장만을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의 FTA 여부가 한국경제의 흥망을 결판내는 절대적 협상은 결코 아니다. FTA를 한다고 한국이 미국한테 먹히는 것도 아니고, 않는다고 한국이 국제적 고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쪽도 선택의 문제다. 설령 정부가 한다 해도 최종 결정권은 국회에 있다. 국회가 비준을 거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터놓고 토론을 시작하자. 선입견을 버리고, 서로의 다른 생각을 인정하면서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열어보자. 묘방이 없는 게 아니다. '토론의 명인'인 노무현 대통령은 장관들한테만 맡길 일이 아니라 직접 나서면 아주 효과적일 것 같다. 남은 임기 중에 미국과의 FTA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다짐했던 만큼 미디어에 나와 국민토론을 몸소 주도한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한국의 토론 문화를 분명히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가 그토록 역설했던 '대화와 타협'을 실현해 보일 좋은 기회다.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