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스트' 전혜진 "욕심 났던 남자 캐릭터, 성별 바꿔 출연했죠"

중앙일보

입력

이성민, 유재명 주연 범죄 스릴러 영화 '비스트'에서 마약 브로커 역할로 파격 변신한 배우 전혜진. [사진 NEW]

이성민, 유재명 주연 범죄 스릴러 영화 '비스트'에서 마약 브로커 역할로 파격 변신한 배우 전혜진. [사진 NEW]

“원래 제안은 다른 인물로 받았는데 대본을 보곤 양아치 춘배가 가장 끌렸어요. 감히 가질 수 없는 남자 캐릭터지만 오히려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감독님께 부탁했죠.”

26일 개봉한 범죄 스릴러 ‘비스트’(감독 이정호)에서 마약 브로커 춘배로 변신한 전혜진(43)의 말이다. 주인공인 형사 한수(이성민)에게 연쇄살인 사건의 단서를 빌미로 자신의 범죄를 덮어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또 다른 형사 민태(유재명)와의 갈등을 부추기는 결정적 인물이다. 원작인 프랑스 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에선 남자였다.
“캐릭터가 유연하고 촉매제 같아 끌렸다”는 전혜진은 이를 성별을 바꿔 완전히 새롭게 소화해냈다.

범죄 스릴러 영화 '비스트'서 파격 변신 #문신·말투·액션…날것 캐릭터 빚어내 #드라마 '검블유'에선 열혈 커리어우먼 #실제 워킹맘 "동네 엄마들 응원에 힘내"

영화 '비스트' 배우 전혜진을 개봉 전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사진 NEW]

영화 '비스트' 배우 전혜진을 개봉 전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사진 NEW]

성별 바꿨지만, 여자라곤 생각 안 했죠 

춘배는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약에 취한 듯 건들거리며 욕설을 내뱉는다. 한국영화의 여느 여성 캐릭터처럼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과 생존본능에 충실하다. 그런 면에선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의 천인숙과도 닮았다.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는 이 비정한 경찰 역할로 전혜진은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남편 이선균(‘기생충’)보다 2년 먼저다.

2년전 칸국제영화제를 찾은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 출연진. 왼쪽부터 설경구, 임시완, 전혜진, 변희원. [일간스포츠]

2년전 칸국제영화제를 찾은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 출연진. 왼쪽부터 설경구, 임시완, 전혜진, 변희원. [일간스포츠]

춘배는 천인숙보다 더 틀을 벗어난 캐릭터. 오랜 알고 지낸 한수는 그를 “새끼”라고 부르며 사내처럼 대한다. 전혜진은 “성별을 바꾸긴 했지만,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계가 없는 사람”이라 했다. “촬영 초반 차 안에서 한수를 만날 때 제가 생각한 연기를 했더니 감독님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예요. 뭔가 명확히 잡히지 않는, 찌릿찌릿하다 건드리는 상대를 확, 하는 그 느낌을 찾느라 악에 받쳐 연기했어요. 초반 대본엔 욕도 더 많았죠.”

짜이지 않은 날것의 액션 어려웠죠

춘배는 강력반 팀장 한수(이성민)와 욕설과 격투로 부딪히는 장면이 많다. 사진은 한수가 경찰서로 찾아온 춘배를 끌고 나오는 장면. [사진 NEW]

춘배는 강력반 팀장 한수(이성민)와 욕설과 격투로 부딪히는 장면이 많다. 사진은 한수가 경찰서로 찾아온 춘배를 끌고 나오는 장면. [사진 NEW]

요란한 외모도 생존수단이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곤두세우듯이 춘배는 바닥인생이고 약자인 자신을 커 보이고, 세 보이게 하려고 뭔가 계속 덧입혀요. 삭발에 눈썹 밀고 얼굴 절반을 문신하잔 얘기도 나왔는데, 너무 오버스럽지 않은 선에서 정리했죠.”
충무로 중견 여성 배우에겐 흔치 않은 역할. 춘배에 맞는 액션 스타일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액션스쿨에서 배운 게 실제 현장에선 잘 안됐어요. 일단 합이 짜여진 듯한 액션은 감독님이 ‘아닌 것 같다’셔서 무술감독님과 즉흥적으로 찾아 나갔죠. 머릿속 이상과 다르게 몸도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 죽기 살기로 뛰어도 제자리걸음 같아 답답했죠.”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은 “춘배가 두 형사의 갈등을 더 깊게 자극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털어놨다.

민폐 될까봐 고민, 제가 더 어렸다면...

밑바닥을 전전해온 춘배는 연약해 보이지 않으려 남자옷을 입고 거친 말투를 쓴다. 얼굴을 뒤덮으려 했던 문신은 너무 튄다는 판단으로 걷어냈다.[사진 NEW]

밑바닥을 전전해온 춘배는 연약해 보이지 않으려 남자옷을 입고 거친 말투를 쓴다. 얼굴을 뒤덮으려 했던 문신은 너무 튄다는 판단으로 걷어냈다.[사진 NEW]

애초 출연 결정 다음 날 “실수했다, 어떻게 거절하나” 전전긍긍했다는 그다. “욕심은 나는데 제가 민폐가 될 것 같아서. 제가 더 어렸다면 모든 게 더 간단했겠죠.”
그가 나이 얘기를 했다. “포털에서 프로필 검색하면 나이가 뜨잖아요. 배우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가도 저부터 기성세대가 돼서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도 같아요. 전 또 애도 있는데 이런 역할 괜찮나, 좀 막을 치는 부분도 있거든요. 제 본연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걸 좀 부숴나가고, 더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려고 노력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상한 에너지의 배우"

그의 배우 데뷔기는 조금 남다르다. 미스코리아 경남 선 출신으로, 우연히 카페에서 여균동 감독의 눈에 띄어 이듬해 영화 ‘죽이는 이야기’로 데뷔했다. 올해가 연기 22년 차. 이번에 함께한 이성민과는 극단 차이무에서 ‘양덕원 이야기’ ‘변’ 등 무수한 연극으로 호흡 맞춘 사이. 이번 영화의 이정호 감독은 그를 “연기할 땐 점잖고 카리스마 있는데 실제론 여성적인 면도 있으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상한 에너지가 있다”고 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선 경찰청 직속 대테러팀장 역으로 짧고 굵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선 경찰청 직속 대테러팀장 역으로 짧고 굵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역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쇼박스]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역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쇼박스]

20대엔 영화 ‘정글 쥬스’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등에서 ‘센 언니’ 캐릭터를 도맡았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선 아이처럼 천진한 ‘갈치엄마’ 역으로 화제가 됐다. 결혼 후엔 ‘사도’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받고, 1000만 영화 ‘택시운전사’ 조연과 ‘시인의 사랑’ 같은 독립영화 주연에 나섰지만, 역할은 점점 제한돼 갔단다. 새로운 활력을 얻기 시작한 게 ‘그놈 목소리’ ‘더 테러 라이브’ 같은 범죄 스릴러에 캐스팅되면서부터다. 지난해 JTBC 드라마 ‘미스티’에선 남편의 죽음과 함께 외도 사실을 알게 되는 역할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초등학생 형제 둔 워킹맘 "인내심 얻었죠"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주인공 만섭(송강호, 오른쪽)과 윗집 상구네 엄마 역을 맡은 전혜진. [사진 쇼박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주인공 만섭(송강호, 오른쪽)과 윗집 상구네 엄마 역을 맡은 전혜진. [사진 쇼박스]

현재 방송중인  tvN 오피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에선 임수정‧이다희와 함께 일하는 여성의 피 튀기는 나날을 그려내고 있다. “평소 쓰지 않는 영어 대사가 많아서 현장이 여유롭진 않지만 여자 친구들과 함께인 것 자체로 즐겁고 편안해요. 익숙지 않은 얘기여서 그런지 시청률은 아쉽지만, 그렇게 써주는 작가님이 고맙죠. 극 중 남녀관계보단, 여주인공 셋이 서로 잘 됐으면 좋겠어요.”
초등학생 두 아들을 둔 그는 “스케줄이 빠듯할 땐 아이들을 최대한 학원에 돌리거나 숙제를 많이 내준다”며 “여동생이나 동네 친구 엄마들이 데려가서 재워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웃 엄마들이 응원을 많이 해줘요. 신경 쓰지 말고 일하라고. 그래서 이사를 못 가요.(웃음) 제가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못 되는데도 엄마들끼린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미스티’ 땐 김남주 언니, 지진희 오빠랑 애들 얘기로 아줌마 수다도 떨었죠.”
그는 “아이는 진짜 힘든 만큼 기쁨을 준다”며 “웬만한 촬영 여건을 다 견딜 수 있는 인내를 주고, 사람이 되게 넓어진다”고도 했다.

이번 영화 '비스트'에선 전작에서 보여주지 않은 맨몸 액션에 나섰다. 상대역 이성민에게 맞으며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 [사진 NEW]

이번 영화 '비스트'에선 전작에서 보여주지 않은 맨몸 액션에 나섰다. 상대역 이성민에게 맞으며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 [사진 NEW]

마동석과 차기작 '백두산'서 민정수석 역 

언젠가 이런 시시콜콜한 육아 이야기도 스크린에서 다룰 수 있을까. “지금도 종종 영화 주연 제안이 들어오지만, 캐릭터가 좋아도 전체 시나리오가 아쉬웠다”는 그는 “아직 여성 주연작은 한정적”이라고 털어놨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백두산’에선 화산 폭발 재난 상황을 맞닥뜨린 청와대 민정수석 역할을 맡았다. 그가 맡아본 배역 중 가장 고위직이다. “상대역인 마동석 선배가 인텔리 교수로 나오는데 의외의 호흡이 재밌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 개봉한 라미란‧이성경 주연 수사물 ‘걸캅스’ 얘기를 꺼냈다.
“요즘은 제작자들도 새로운 소재에 목말라하고 있지만 실제로 (여성 주연 영화가) 나오기는 아직 힘든 것 같아요. 그래도 ‘걸캅스’ 같은 상업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요.”

관련기사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