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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청년 마음 긁는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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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준영 정치팀 기자

김준영 정치팀 기자

“내가 아는 어떤 청년은 스펙이 하나도 없었다. 학점이 3점도 안 됐고, 토익 점수도 800점이었다. 졸업 후 15개 회사에 서류를 냈는데 열 군데에선 서류심사에서 떨어졌고, 서류를 통과한 나머지 다섯 군데는 아주 큰 기업들인데도 다 최종합격이 됐다.”

저스펙 대기업 취직 성공 신화를 썼다는 ‘어느 청년’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아들이다. 황 대표는 지난 20일 숙명여대 특강에서 “큰 기업들에서는 스펙보다는 특성화된 역량을 본다”며 아들 사례를 꺼내 들었다. 황 대표는 아들의 남다른 역량으로 ‘고교 영자신문반 편집장’, ‘대학 조기 축구회 리더’ 등을 꼽았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 시장을 뚫기 위해 ‘스펙 쌓기’ 경쟁에 내쳐진 대학생들은 이 발언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히말라야 등반도 별로 내세울 이력이 못되는 시대에 고교 영자신문반 편집장이나 조기 축구회 얘기는 공감을 얻기 힘든 얘기였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엔 청년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특강이 있었던 숙대 재학생 커뮤니티엔 “아빠가 황교안인 게 취업의 비밀”이라는 글이 올라왔고, 황 대표 아들의 모교인 연세대 커뮤니티엔 “졸지에 우리 학교 법대 출신이 무스펙이 되어버렸다”는 자조가 나왔다. 황 대표로선 야심 찬 청년 잡기 행보였지만, 되레 청년과 한국당 인식의 괴리만 확인시킨 꼴이 됐다.

이에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의 취업전략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아들의 우월성을 은연중에 드러낸 전형적인 꼰대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이런 논평을 낼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올해 초 민주당 고위 당직자들은 2030세대에서 당 지지율이 낮아지는 이유를 “전 정부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도 있다”(설훈 최고위원), “전 정부 반공교육이 20대를 보수화시켰다”(홍익표 수석대변인) 등으로 분석했다. 이런 수준의 진단에서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리 없다.

정치권은 ‘청년 세대와의 소통’을 강조하지만, 결국 청년층을 ‘표밭’ 이상으로 진지하게 여긴다는 인식은 찾기 힘들다. 민주당은 청년층을 ‘계몽을 통한 조직화가 필요한 집단’으로 여기는 듯 하다. 한국당은 청년 정당을 표방하지만, 정작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헌정 사상 최고령(평균 55.5세) 국회라 그런 걸까. 정치권과 청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됐다. 청년은 단일화된 실체가 아니라 성별·직업·가치관·경제수준 등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의 집합이다. 그런데 정치권은 청년을 자꾸 하나의 틀 속에 억지로 집어 넣어 꿰맞추려 한다. 그러다보니 자꾸 헛발질이 나온다. 정치인들은 수십년 전 자기 경험에 비춰 요즘 청년을 마음대로 재단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속 청년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청년대책의 출발점이다.

김준영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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