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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가 품은 신장, 언어·종교·외모는 중국과 달라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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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호 26면

윤태옥의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신장 카스 인근의 아투스 천문. [사진 윤태옥]

신장 카스 인근의 아투스 천문. [사진 윤태옥]

“여긴 중국이 아니네!” 내 친구들이 신장여행 2~3일을 넘기기 전에 탄식처럼 내뱉는 한마디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현지인들의 생김새와 언어는 물론 종교·복장·관습까지 일반적인 중국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지명으로 봐도 그렇다. 신장은 새로운(新) 강역(疆)이란 뜻이니 그 이전에는 남의 땅이었다는 것 아닌가. 고대의 ‘서역 36국’도 마찬가지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땅이었으면 서역 36주나 36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중원이 신장 제대로 지배한 건 #지난 2100년 역사 중 25% 남짓 #청 건륭제가 ‘새로운 강역’ 선포 #국·공 내전 후 신중국으로 넘어가 #대량 유입된 한족이 인구의 과반 #신장이 누구 땅이냐 묻는 건 우문

“신장 무너지면 몽골 이어 베이징도 몰락”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중원의 식자들이 말하는 신장의 역사는 장건의 서역사행이나 개척이란 말로 시작한다. 사행은 맞지만 개척은 적확하지는 않다. 한대나 당대에 쿠처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둔전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일부 시기의 일부 제한된 지역이었을 뿐이다. 송나라가 요와 금에 눌려 살던 시대는 말할 것도 없다.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차가타이 칸국과 원나라가 분할하고 있었다. 명대 역시 서역은 가욕관 바깥에 있는 머나먼 이국땅일 뿐이었다. 그러나 청대 건륭제는 서역을 새로운 강역이라고 선포했고 그것은 중화민국과 오늘의 신중국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중원의 주도 세력이 변경의 신장을 지배한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0세기까지의 2100년 역사 가운데 중원이 신장을 제대로 지배한 것은 중화민국과 신중국까지 포함해도 많아야 20~25% 정도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변방을 여행하면서 신장이 중국에 통합된 근현대사를 짚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청나라는 동북의 신흥 강자 만주족과 북방의 전통 강자 몽골이 결합한 북방동맹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족이 흥기하기 시작한 17세기 초 몽골은 남-북-서 세 덩어리로 나뉘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지도로 보면 대략 내몽골, 몽골공화국, 신장에 해당한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기에 몽골의 핵심이었던 차하르부(察哈尔部)와 코르친부(科尔沁部) 등 남몽골이 복속해왔다. 강희제 중반에는 북몽골(칼카)이 오이라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자진해서 귀속해 왔다.

서몽골은 오이라트 몽골이라고도 하는데 알타이산맥에서 이리강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준가르부(准噶尔部)가 주력이 되어 강력한 유목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준가르는 1690년대 강희제 중반부터 1750년대 건륭제 초기까지 70여 년간 상쟁했다. 그러다가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1752년 준가르의 아무르사나가 계승갈등 와중에 밀려 나와서는 청나라에 귀순한 것이다. 건륭제는 1755년 아무르사나를 앞세워 준가르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아무르사나가 오이라트 여러 부를 장악하면서 청조와의 제휴를 파기하고는 현지의 청나라 군대를 학살해 버렸다. 건륭제는 아무르사나의 서몽골을 다시 공격했고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청나라는 예전의 정복전쟁과는 달리 잔인하게 결말지었다. 노예로 보낼 여자와 아이, 노인을 제외한 모든 준가르인들을 죽임으로써 준가르를 아예 절멸시킨 것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건륭제는 아무르사나 정벌 이후 서몽골에 대해서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 1759년 새로운 강역, 신장이라 선포했다. 이것은 준가르에 대한 승리 이상의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누르하치 이후 150년 만에 내몽골, 북몽골에 이어 마지막 남은 서몽골까지 몽골 전체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것이다. 만주족으로서는 중원의 정복에 버금가는 위대한 치적이다.

청조는 신장에 대해 복잡하고 정교한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팔기체제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독점하는 군정을 기본으로 했다. 군정 총수인 이리장군(伊犁將軍)이 신장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 아래 유목지역에는 자사크라고 하는, 청조에 충성하는 현지 지도자들을 지방통치자로 임명했다. 투루판이나 하미의 왕들이 바로 그들이다. 신장 남부 등지에는 벡이라고 하는 무슬림 관리들을 지역관리로 임명하여 통치했다. 우루무치를 포함해 한족 농민과 상인들이 증가한 곳에는 현·주·도를 설치하고 중원의 관리를 내려보냈다. 학자에 따라 이때의 신장을 청의 보호국이나 봉신국으로 보기도 하고, 완전히 청에 편입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약 1세기 동안 비교적 평온했으나 19세기 중반에 상황이 크게 변했다. 신장의 팔기군은 쇠락했고 지방관들의 부패와 착취는 심해졌다. 이미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동남해안으로부터의 위협과, 신장을 둘러싼 서북내륙으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 1864년 신장에서 투르크계 무슬림의 반란이 일어났다.

1875년 좌종당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신장 지역 최고책임자로는 최초의 한족 관리였다. 좌종당의 군대는 1878년 허톈까지 점령하여 신장 재정복을 완료했다. 청나라는 신장 재건에 착수하여 1884년에는 기존의 군정체제를 직할 행정체제인 성(省)으로 개편했다. 위구르인들은 1884년의 건성(建省)을 부당한 병합으로 간주한다. 신장성은 1910년 신해혁명에서 청조에 반기를 들어 중화민국으로 돌아섰다. 신장은 제2차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신중국으로 넘어갔다. 그게 오늘의 신장 위구르자치구다.

중국, 만주족 황제들에게 감사해야 할 듯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위구르·몽골·카자흐족 등 중국 내 소수 민족도 많지만 19세기부터 한족이 대량 유입돼 지금은 한족 인구가 절반을 넘어섰다. [사진 윤태옥]

신장은 누가 뭐래도 중화인민공화국의 땅이다. 청나라의 준가르 정복 이후 반란과 재정복, 건성 그리고 신해혁명을 거쳐 중화민국으로, 다시 신중국으로 넘어왔다. 그게 250여 년의 역사가 흐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서역도호부와 같은 고대사는 핵심이 아니다. 국가 권력과 백성을 분리해서 신장을 ‘그들의 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라는 간단한 말은 그 안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대단히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민족에 따라 국가를 세우고 영토를 나눈다면 신장을 몇 개로 어떻게 쪼개야 할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위구르인이 절대다수인 것도 아니다. 신장 지역의 소수민족 가운데 위구르인이 가장 많아서 위구르자치구이지만 그들 이외에도 카자흐족이나 몽골인들도 많다. 한족은 19세기부터 대량 유입돼 이미 신장 인구의 반을 넘어섰다. 그렇다고 한족의 땅이라고 하는 것도 온당치는 않다. 분명한 것은, 어떤 국가나 어떤 지역에도 주도적인 권력과 백성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괴리가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신의 역사경험을 남의 나라 먼 땅에 대입하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한다. 신장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곳 역사는 대단히 복잡하다, 수천년간 유럽에서 동아시아, 인도에서 시베리아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의 수많은 발길이 중첩된 역사의 요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신장이 누구 땅이냐는 것은 우문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례한 질문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넓고 넓은 변방 여행에서 신장을 떠나 칭하이성의 황하 발원지로 가면서 나 스스로 우문을 더듬은 셈이다. 지금의 신중국은, 그 넓은 땅에 풍부한 자원까지 안겨준 만주족 황제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한다는 어느 중국학자의 핀잔 같은 한마디로 마무리하고 여행길을 이어간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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