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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천성산 도롱뇽’과 ‘블리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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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뭘 어쩌라는 말인가. 해법 없는 문제를 받으면 답답해진다. 못 푼다고 닦달까지 해대면 억울해진다. 최근 제철업계가 딱 그 모양이다. 최근 충남·경북·전남도가 지역 내 현대제철(당진)과 포스코(포항·광양) 제철소에 열흘간 조업정지 처분을 통보했다. 고로(高爐)  정비 과정에서 ‘블리더’라는 비상용 안전밸브를 통해 오염 물질을 배출했다는 이유다. 대기환경보전법에 따른 ‘적법한’ 조치다. 이로써 문제가 해결됐는가.

고로 정비 중 가스 배출 문제삼아 #대안 없이 제철소 조업정지 처분 #극단적 환경주의 기조 걱정된다

제철소 고로 위에 설치된 ‘블리더’는 전기압력밥솥의 수증기 배출 밸브 격이다. 고로 내부에 이상 압력이 발생할 경우 자동으로 열려 폭발 사고를 방지한다. 제철소의 모든 대기 배출물은 집진 시설을 거쳐야 하지만, 비상용 밸브는 예외를 인정받는다. 쟁점은 고로 정비를 비상 상황으로 볼 수 있는가다.

한두 달에 한 번씩 고로 정비를 할 때는 고로 안으로 강한 압력의 스팀(수증기)이 주입된다. 고로 안 잔류 가스가 외부 공기를 만나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렇게 주입된 수증기와 잔류 가스를 빼내기 위해서는 ‘블리더’를 잠시 개방해야 한다. 환경 단체들은 문제 삼는 것이 이 대목이다. 정비를 핑계로 오염 물질을 방출한다는 것이다.

제철소는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항변한다. 세계 모든 제철소가 다 이런 방식을 쓴다고 한다. 사실 배출 가스의 양이 대단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하루 8시간 운행하는 중형급 승용차가 열흘 정도 배출하는 정도다. 이것 때문에 제철소 주변 공기가 더 나빠졌다는 증거도 딱히 없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이 가만히 놔둘 리 없다.

대안이 있느냐가 문제다. 공장을 멈춘다고 답을 찾기는 어렵다. 높이 100m가 넘는 거대한 고로에 레고 조립하듯 뚝딱 집진 설비를 갖다 붙일 수는 없다. 현재 기술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떡하나? 가능할 때까지 조업 정지? 고로를 열흘 정도 멈추면 쇳물이 굳어 다시 가동하는 데 최소 3개월이 걸린다. 고로당 매출손실만 8000억원가량이다.

공무원들은 맡은 바 본분에 ‘충실’했다. 지난 3월 말 환경부는 사업장별 오염물질 배출량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가 1위였고, 포스코 광양제철소와 포항제철소가 3, 4위였다. 환경단체들이 제철소를 고발한 것은 그 이후였다. 지자체 공무원들은 현장 조사를 했고, 환경부는 위법이라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법은 법이다! 불만 있으면 행정심판과 소송으로 해결하라!

결국 ‘구성의 오류’다.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한 결과가 오히려 문제를 키웠다. 선제적인 대안 찾기와 정책 조정 노력은 없었다. 부랴부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국무조정실에서도 들여다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환경과 경제의 충돌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동안 의지가 없었던 걸까, 능력이 없었던 걸까.

현 정부 들어 ‘굴뚝 사업장’에 환경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조업정지 명령을 내리고 보는 기류가 팽배하다. 경북 봉화에서는 전국 아연 생산의 30%를 차지하는 영풍석포제련소에 120일 조업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실행될 경우 준비와 재가동을 위해 1년간은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한다. 산업계나 지역 경제에 미칠 영향은 생각해봤는지 궁금하다. 경제를 위해 환경은 눈감고 넘어가자는 말이 아니다. 기업에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대안부터 한 번 생각해보란 이야기다.

기업에 환경 감수성이 요구되듯, 환경 정책에도 경제 감수성이 필요하다. 생태학적 근본주의에 빠져 한동안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천성산 도롱뇽 사건’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 철강업계 사태를 그와 비교하는 것은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적 담론에 귀 막은 채 집요하게 보(洑) 철거와 탈(脫)원전에 매달리는 정부를 보면, 이번 ‘블리더 소동’도 그때의 환경 극단주의와 맥이 닿아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뿐이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