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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제는 발전해도 정치는 멈춰 선 절름발이 됐다”

중앙일보

입력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돼 생을 마감해야 했던 당시 중국의 2인자 류사오치가 외쳤던 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인민에 의한 역사가 쓰이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4일로 중국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1989년 6.4 천안문(天安門) 사태 3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한 세대가 지난 지금도 천안문 사태란 말 자체가 중국에서 금기어로 돼 있듯이 민주를 외치다 스러진 수많은 학생과 시민의 희생은 전혀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관영 발표와는 다른 독자적 정치평론으로 서방에도 많이 알려진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 69)을 지난달 24일 중앙일보·JTBC 베이징 총국에서 만나 ‘천안문 사태 30주년의 중국’에 대해 들어봤다.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 중국 관방과는 다른 독자적 정치평론으로 유명한 장리판은 "1989년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실패하면서 중국은 경제는 발전해도 정치는 멈춰선 절름발이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신경진 기자]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 중국 관방과는 다른 독자적 정치평론으로 유명한 장리판은 "1989년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실패하면서 중국은 경제는 발전해도 정치는 멈춰선 절름발이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신경진 기자]

중국의 젊은 세대가 천안문 사태를 아나.
“역사의 공백과도 같다. 부모나 교사든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천안문 사태에 대한 중국 당국의 호칭이 왔다 갔다 한다.
“89년 6월 4일 사태 발생 당시엔 ‘동란’ 또는 ‘폭동’으로 불렸다. 이후 ‘정치 풍파’로 변했다. 그래서 한동안 중국에서 간행되는 출판물엔 ‘베이징 풍파’란 표현이 쓰였다. 한데 지난해 또다시 바뀌었다.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가 개혁개방 40주년 역사를 정리하며 천안문 사태를 다시 ‘폭란(暴亂)’이라고 규정했다.”

'폭동' ‘폭란’으로 규정돼 부정적 색채

‘폭란’과 ‘정치 풍파’는 어떤 차이가 있나.
“’정치 풍파’란 말은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동란’ 또는 ‘반혁명 폭란’이라 부르는 건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간 것이다. 부정적인 색채가 강하다. 내가 보기엔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다.”
1989년 6월 5일 한 중국 남성이 베이징 장안대로에 진입하는 탱크를 단신으로 막아서고 있다. 제프 와이드너 당시 AP 통신 기자가 촬영한 이 사진은 이후 '탱크맨'으로 알려지며 '천안문 사태'의 상징이 됐다. [AP=연합뉴스]

1989년 6월 5일 한 중국 남성이 베이징 장안대로에 진입하는 탱크를 단신으로 막아서고 있다. 제프 와이드너 당시 AP 통신 기자가 촬영한 이 사진은 이후 '탱크맨'으로 알려지며 '천안문 사태'의 상징이 됐다. [AP=연합뉴스]

왜 다시 과거 표현으로 돌아갔나.
“지난 6년여 동안 체제의 안과 바깥 모두에서 모순이 격화됐다. 국제적인 긴장 또한 깊어졌다. 이런 상황에선 사회 전체에 대해 고삐를 조이게 된다.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할까 봐 예방적인 조치가 이뤄지기도 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건가.
“두 가지 필요에 의한 것이다. 하나는 집권당의 집권을 보장하기 위한 필요에서, 또 다른 하나는 시 주석 자신의 정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다. 공산당 국가의 역사를 볼 때 한번 정권을 잃으면 되찾을 수 없다. 집권자가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89년 6.4 사태 때 학생들이 외친 건 민주이지 공산당 타도가 아니지 않나.
“맞다. 당시 학생들이 운집한 천안문 광장으로 가 그들의 9가지 주장을 들었다. 주로 특권과 부패를 성토했다. 개혁개방 이후 권력자의 가족과 자녀가 특권을 이용해 많은 돈을 벌었고 중국 사회는 이에 대한 불만이 컸다. (덩샤오핑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됐던) 후야오방이 실각한 것도 특권 계층을 단속하며 그들의 이익을 해쳤기 때문이다. 그런 후야오방이 (89년 4월 15일) 사망하자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할 필요가 있었나.
“학생들의 주장은 공산당 반대도 아니고 공산당 집권 반대도 아니었다. 그저 공산당의 개혁을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공산당 내 일부 원로들은 이를 그들의 통치를 뒤엎으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덩샤오핑, 20만 학생 운집을 도전으로 봐

당시 진압에 탱크까지 동원한 건 왜인가.
“당시 분위기를 봐야 한다. 나는 그때 후야오방 가족의 요구로 후야오방 장례에 관한 기록을 하게 돼 덩샤오핑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천안문 광장에 20만 학생이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 인민대회당에서 추도회가 열렸다. 덩은 분명히 염색했고 심지어 옅은 화장도 했다. 전혀 늙지 않았고 매우 젊게 보이려 했으며 걸음걸이도 빨랐다. 그러나 매우 분노한 모습이었다. (20만 학생 운집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봤다.”
1989년 5월 1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과 시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1989년 5월 1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과 시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지 30년이 흘렀다. 90년 이후에 태어난 90후(後)는 거의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왜 지금도 이렇게 중국 당국은 민감하게 대응하나. 올해를 ‘정치 안전의 해’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서방은 청년이 노인을 추월하는 ‘살부(殺父)의 문화’를 갖고 있는 반면 중국은 반대로 노인에 대한 청년의 도전을 불허하는 ‘살자(殺子)의 문화’가 있다.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한다. 현재 천안문 사태와 관련이 있는 여러 사람이 이미 당국에 의해 ‘조용히 있으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천안문 당분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워 

천안문 사태는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어렵다고 본다. 6.4 민주화 운동이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정치가 특별히 안정되고 경제가 매우 좋아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가 과거사 바로잡기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관(官)과 민(民)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경제도 나빠지고 있다. 중국의 한 원로가 시진핑 주석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6.4 사태에 대한 평가를 올바로 하면 역사적인 일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시 주석은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당분간 천안문 사태 재평가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빠른 발전을 했는데.
“마오쩌둥 사후 중국은 당과 민심이 일치했다. 경제를 최우선으로 하면서도 정치개혁을 해 나갔으면 공산당이 계속 집권하되 일종의 개명 전제나 헌정을 향해 점차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6.4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이런 과정이 중단됐다. 이로 인해 중국은 경제는 발전해도 정치는 멈춰선 절름발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모습. 유혈 진압 과정의 격렬함을 그대로 보여주듯이 탱크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FP=연합뉴스]

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모습. 유혈 진압 과정의 격렬함을 그대로 보여주듯이 탱크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FP=연합뉴스]

6.4 사태는 중국의 역사 발전에서 어떤 의미를 갖나.
“우선 중국이 민주화를 향해 나아갈 역사적 기회를 놓쳤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덩사오핑은 과거 양극화가 출현하면 개혁은 실패한 것이라 했다. 현재의 양극화 현상을 놓고 개혁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제적으론 실패한 것이다. 비록 89년 민주화 운동이 중국에선 실패했지만 나비 효과를 일으켜 얼마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이 끝났다. 어찌 보면 세계 역사를 바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인이 당시 흘린 피는 충분히 기념할 의미가 있다.”

시진핑, 반대에도 의지 굽히지 않는 스타일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마오쩌둥 시대의 구호가 많이 보인다.  
“내가 보기엔 청소년 시대의 성장 환경과 교육, 지식이 그의 일생을 결정한다. 불행하게도 시 주석의 청소년 시절은 문혁 시기와 겹친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시골로 보내졌다. 업신여김도 받았고 친구들과 패싸움하다 도망도 가는 등 굴욕을 감내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주목할 건 그가 남들이 반대해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오를 인생의 모델로 삼고 있다. 군대 시찰을 좋아하는 것도 마오와 닮았다.”
시 주석은 농촌으로 보내졌을 때 많은 독서를 했다고 하는데.
“영국 BBC는 시 주석이 산시(陝西)성 량자허(梁家河)에서 토굴 생활을 할 때 밤마다 책을 읽었다고 보도했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특히 헤밍웨이의 강인한 정신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재미 있는 이야기도 있다. 시 주석과 함께 농촌 생활을 했던 한 사람은 시 주석이 두 마디 말을 했는데 하나는 독서를 싫어하고 다른 하나는 지식분자를 싫어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기자 출신의 한 사람은 시 주석이 아주 많고 많은 무협소설을 읽었다고 말했다.”

 중국 영수 아닌 세계의 영수 꿈꾸고 있어

시 주석은 지난해 헌법을 수정해 국가주석 임기의 제한을 없앴다.
“이론상으로 시 주석은 나이가 90대인 2049년이나 2050년까지도 집권할 수 있다. 현재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10년은 너무 짧고 최소 20년은 있어야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빨리 물러날 수도 있지 않나.
“쉽지 않다. 시 주석은 중국의 영수뿐 아니라 세계의 영수를 꿈꾼다. 또 그가 대대적인 반부패 운동을 벌이면서 원한을 산 이가 너무 많다. 권력 자체가 사람을 유혹하는 점 또한 있어 빨리 은퇴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퇴임 시기를 생각해 후계자를 양성해야 하지 않나.
“후계자는 가장 위험한 자리다. 마오 시대의 후계자는 모두 숙청되지 않았나. 한때 후춘화 부총리가 많이 거론됐는데 그가 시 주석의 뒤를 이을 가능성은 적다. 후계자는 시자쥔(習家軍, 시진핑 사람들) 중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중국 공산당의 후계자 양성은 일종의 엘리트 도태 체제다. 말을 잘 듣는 사람을 뽑아 퇴임하는 권력자의 이익과 권리를 보존하게 한다. 문제는 시자쥔 대부분이 지방 출신으로 나라 전체의 일을 다뤄본 적이 없고 그들의 안목과 식견이 대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장리판=1950년생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다. 중국 사회단체와 당파사, 중국 현대화와 지식분자 문제를 주로 연구하며 『중화민국사』 편찬에도 참여했다. 중국 체제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터라 2013년 11월 이후 소셜미디어에서의 그의 계정이 취소된 상태다. 아버지 장나이치(章乃器)는 1930년대 항일을 외친 ‘칠군자(七君子)’ 중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베이징=유상철·신경진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천안문 사태 30주년 중국 역사학자 장리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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