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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6 첫승이 US오픈…휠체어 아빠와 일군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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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US오픈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이정은6. [AFP=연합뉴스]

US오픈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이정은6. [AFP=연합뉴스]

이정은6(23)이 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컨트리클럽오브 찰스턴에서 끝난 US여자오픈에서 합계 6언더파 278타로 역전 우승했다.

장애인용 차에 딸 태워 국내 투어 #딸은 골프장서 아빠 휠체어 밀어 #이정은 “가족 생계 위해 골프 시작” #100㎏ 역기 메고 스쿼트 독한 훈련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는 같은 이름의 선수가 등장하면 등록 순서에 따라 이름 뒤에 2, 3, 4 등의 숫자를 붙인다. 한국인, 특히 여성들은 유난히 동명이인이 많다.

이정은6은 평범한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 프로가 된 뒤엔 6이라는 숫자를 받아 이름 뒤에 붙여야 했다. 이정은6은 LPGA로 가면서 번호표를 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숫자 ‘6’을 달고 갔다.

미국인들은 이름 뒤에 숫자를 붙인 걸 신기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2017년 이정은6이 US오픈에서 우승 경쟁을 할 때 미국 골프계에선 숫자를 붙인 그의 이름이 화제가 됐다.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무거운 바벨을 들고 스쿼트를 하고 있는 이정은6. [이정은6 인스타그램]

무거운 바벨을 들고 스쿼트를 하고 있는 이정은6. [이정은6 인스타그램]

이정은6은 당당하다. 그는 “흔한 내 이름이 싫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들 꺼리는 6이라는 숫자를 오히려 행운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2017년 4월 KLPGA투어에서 첫 우승(롯데렌터카 여자오픈)을 할 때 1~3라운드에서 모두 6언더파 66타를 쳤다. KLPGA 투어에선 6승을 거뒀다. 개인 최저타 기록은 60타다.

이정은6은 “6을 붙인 뒤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면서 아예 별명도 ‘핫식스’로 했다. 그는 골프공에도 큼지막하게 6이란 숫자를 새기고 경기를 한다.

3일 US여자오픈 마지막 날 경기에서도 ‘6’은 자주 등장했다. 이정은6은 6등으로 최종 라운드를 시작했는데 합계 6언더파로 우승했다. 이정은6이 골프공에 그린 6자는 여러 차례 TV 화면에 잡혔다. 그 빨간색 6자가 가장 밝게 빛났다.

시상식장에서 이정은6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통역 겸 매니저. [방송화면 캡처]

시상식장에서 이정은6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통역 겸 매니저. [방송화면 캡처]

올해 US여자오픈은 개막 전부터 한국 여자골퍼 비하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다. 타이거 우즈의 전 코치인 행크헤이니는 지난달 30일(한국시간) 라디오에 출연해 “US여자오픈 우승자는 한국인이 될 거다. 이름은 모르는 이씨다. 한국인들은 이름에 숫자도 쓴다”고 했다가 인종 차별과 여성 골프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헤이니는 뒤늦게 사과했고 라디오에서 퇴출당했다. 우즈도 “헤이니는 징계를 받을 만하다”고 비난했다. 그 논란 속에서 숫자 ‘6’을 붙인 이씨, 이정은6이 우승한 것이다. 이정은6이 우승으로 가장 멋진 복수를 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정은6의 아버지 이정호(55)씨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다. 딸이 4세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정은6은 레슨프로를 목표로 삼았다. “고향인 전남 순천에는 여성 티칭 프로가 없으니 레슨프로가 되면 집안 생계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지난해 말 이정은6이 미국에 진출하기 앞서 기자회견장에 나온 아버지 이정호(가운데)씨, 어머니 주은진씨. [중앙포토]

지난해 말 이정은6이 미국에 진출하기 앞서 기자회견장에 나온 아버지 이정호(가운데)씨, 어머니 주은진씨. [중앙포토]

독하게 훈련했다. 최고 100㎏짜리 역기를 메고 스쿼트를 했다. 연습장에 가장 일찍 나가서, 가장 늦게까지 훈련을 했다. 숙소에 들어와서도 꿈속에서도 스윙을 했다. 2015년 국가대표가 됐고, 그해 가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3부, 2부를 거쳐 KLPGA 1부 투어 출전권을 땄다. 2016년 KLPGA 신인왕, 2017년에는 최고 선수가 됐다. 올해 미국 LPGA 투어에 진출해 여자골프에서 가장 큰 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

레슨 프로라는 소박한 꿈을 꾼 이정은6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 최고가 됐을까. 이정은6은 “어릴 때 집안이 어려워 큰엄마 손에 자라기도 했다. 생활도 여유롭지 못한데 나를 도와주신 분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운동했다”고 말했다.

이정은6은 골프공을 구분하기 위한 표기 도 숫자 6을 쓴다. [AFP=연합뉴스]

이정은6은 골프공을 구분하기 위한 표기 도 숫자 6을 쓴다. [AFP=연합뉴스]

요즘 선수들은 넉넉하지 못한 가족사를 창피하다고 여긴다. 이정은6은 숨기지 않는다. KLPGA 투어에서 뛸 때 아버지가 운전하는 장애인용 자동차를 타고 투어 생활을 했다. 반대로 골프장에서는 이정은6이 종종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어준다. 미국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성장환경을 이야기했다. US오픈 우승이 확정되자 LPGA 투어는 4살 때 아버지가 다치고 레슨프로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골프를 하려 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그래서 더 갈채를 받았다.

이정은6은 이날 우승 상금 100만 달러(약 11억8000만원)를 받았다. 한국인으로서 열 번째 US여자오픈 우승이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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