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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한빛PD 父, 대통령에게 "노동자, 기생충과 다를바 없어"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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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한빛 CJ E&M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NM E&M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제공]

고 이한빛 CJ E&M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NM E&M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제공]

방송계의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를 고발하다 세상을 떠난 고 이한빛 CJ E&M PD의 아버지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방송근로자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 개선을 촉구했다.

이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은 3일 시민사회단체 '생명안전 시민넷' 홈페이지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했다. 이 이사장은 "문 대통령께서 대선 후보 시절 이 PD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 CJ E&M이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이어 "이 PD의 유지를 실현하고 방송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카메라 뒤 노동자는 아직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며 "허울뿐인 '개인 사업자'라는 미명 아래 방송 노동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과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과 죽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라고 호소했다.

이 이사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다는 소식이 들려와 기대했지만, 시행령에는 원청 기업에 책임을 묻는 조항이 빠지고 방송노동자를 비롯한 많은 영역이 법의 적용에서 제외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구체적인 제제나 규제 방안이 실종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유명무실한 법이 되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고 이한빛 tvN PD 사망사건 기자회견. [연합뉴스]

고 이한빛 tvN PD 사망사건 기자회견. [연합뉴스]

이어 "이대로는 방송제작 현장의 '죽음의 외주화'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모든 방송근로자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4대 보험 가입, 모든 사업장에 근로기준법 적용 등을 촉구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최근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주 52시간 근로를 준수하고 표준근로계약서도 작성해 만든 성과"라며 "노동인권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면 더욱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송 노동자는 물론 이 땅의 모든 노동자가 기생충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노동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대통령께서 노동존중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끌어달라"고 했다.

고 이한빛 PD 어머니. [일간스포츠]

고 이한빛 PD 어머니. [일간스포츠]

앞서 이 이사장의 아들 이 PD는 지난 2016년 10월 26일 숨진 채로 발견됐다. 자신이 조연출로 참여했던 tvN 드라마 '혼술남녀' 촬영을 마치고 실종된 이후의 일이다. 이 PD는 유서에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다"라고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4월 20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이 PD 죽음의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한 바 있다. 이후 CJ E&M은 열악한 방송 노동환경 개선과 재발 방지 대책 이행을 약속했다.

그의 아버지인 이 이사장과 동생인 한솔 씨는 고인 유지를 따라 한빛센터를 설립하고 방송노동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고 이한빛 PD 아버지 이용관 이사장이 쓴 편지 전문

대통령님께

촛불정신을 실현하고 공정한 사회,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와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수고하시는 대통령님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이사장 이용관입니다. 저희 아들 이한빛 PD(tvN '혼술남녀' 조연출)는 정규직 PD였지만,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노동인권 문제를 고발하며 2016년 죽음으로 항거한 27살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이한빛 PD의 죽음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대통령님께서는 대선후보 시절에 애도와 함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며 다시는 이한빛 PD와 같은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메시지는 무척이나 큰 힘이 되어 계속 이한빛 PD의 사망에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던 CJ ENM이 유가족과 방송 노동자들 앞에서 책임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CJ ENM은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방송 노동환경 개선과 재발방지 대책 이행을 약속했었습니다. 적반하장으로 일관하던 CJ ENM을 움직이게 만든 힘을 주신 대통령님께 뒤늦게나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 후 CJ ENM에서 받은 위로금, 그리고 이한빛 PD의 죽음을 함께 추모하며 방송 노동환경이 하루빨리 개선되기를 원하는 분들이 조금씩 건네준 후원금을 바탕으로 2018년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한빛센터는 이한빛 PD의 유지를 실현하고 방송미디어산업에 근무하는 취약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방송 노동인권 개선을 위하여 전국언론노동조합과 함께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2019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입니다.

방송제작 현장의 카메라 뒤에 노동자는 아직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허울뿐인 '개인 사업자'라는 미명 아래 방송 노동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과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과 죽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방송사의 지시에 따라 방송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에 방송 노동자들은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못하는 사람이 넘쳐 납니다. 아무리 장시간 촬영을 해도 하루 일당만 주는 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살인적인 노동환경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소한의 노동자로서 권리인 4대 보험마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노동자이지만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노동자 아닌 노동자'인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방송제작 현장에 변화가 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을 보고 크게 한숨을 쉬고 말았습니다. 원청 기업에 책임을 묻는 조항이 빠지고, 시행령을 통해 방송노동자를 비롯한 많은 영역이 법의 적용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게다가 구체적인 제제나 규제 방안이 실종되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유명무실한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방송 노동은 노동시간 적용 특례업종에 산업안전보건법의 예외 업종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방송 노동자들은 지속해서 고강도의 야간-장시간 촬영에 시달리며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심하면 과로사 등의 사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방송 제작 노동은 현장의 특성상 특정 장소에서 비교적 단기간 동안 촬영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전부터 산업안전과 거리가 멀었던 산업 영역이기 때문에 안전관리 책임자가 전혀 배치되지 않고, 그로 인해 현장에서 노동 안전에 대한 감시는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열악하고 처참했던 노동 환경, 근로기준법과 산안법의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던 영역이 바로 방송 노동이었습니다. 한빛센터를 비롯한 수많은 방송 노동자들이 산안법 개정을 통해 방송 노동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죽음의 외주화'가 끝이 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이번 산안법 하위 법령은 개정 취지와 다르게 큰 폭으로 후퇴하였습니다. 방송제작 현장의 '죽음의 외주화'가 앞으로도 쉽게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방송제작 현장의 안전과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는 등 구체적이며 촘촘하게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이 보호되고 노동인권이 보장될 수 있는 법령이 필요합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본래 제정되었던 취지에 맞도록 법령을 바꿔야 합니다.방송제작 현장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인하여 '노동자도 없고 사용자도 없는' 노동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습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방송 노동 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을 갉아먹는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한 살인적인 노동을 이제는 그만 멈추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방송 노동자 누구나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받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노동자가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인 4대 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하고, 모든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방송 제작현장에서 초장시간 노동을 금지하여 건강권과 노동인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한빛센터와 함께 방송 노동자들이 CJ ENM 앞에서 펼친 시위에서 나온 구호인 '잠 좀 자고 일하자'라는 말은 당연한 수면권, 건강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2019년 한국 방송 노동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최근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단연 한국 영화산업의 쾌거입니다. 하지만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의미는 단순히 작품성에 그치지 않습니다. 근로기준법에 의한 최장 노동시간인 52시간을 준수하고 모든 스태프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여 노동인권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면 더욱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드러낸, 감독과 현장에서 땀 흘린 모든 스태프가 함께 만든 성과입니다. 방송 노동자는 물론 이 땅의 모든 노동자가 '기생충'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노동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개개인이 자기 노동의 가치에 행복감을 누릴 수 있는 노동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정부와 관련 부처가 방송노동자도 모든 노동자와 같이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만들고 법령으로 제정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2019년 6월 3일

이한빛 PD 아버지 이용관 드림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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