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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도둑맞은 최초의 서양식 세계지도 만국전도...벽지 속에서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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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전도에 표시된 우리나라. 만국전도는 위도‧경도 표시 등 서양의 지도 표기법을 충실히 따랐지만, 푸른색으로 칠한 바다에 물결을 그려넣는 등 개성있는 면도 돋보인다. 김정연 기자

만국전도에 표시된 우리나라. 만국전도는 위도‧경도 표시 등 서양의 지도 표기법을 충실히 따랐지만, 푸른색으로 칠한 바다에 물결을 그려넣는 등 개성있는 면도 돋보인다. 김정연 기자

도둑 맞았던 조선 최초의 서양식 세계지도 ‘만국전도’와 ‘숭례문’ 글씨가 담긴 목판을 다시 찾았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와 문화재청 문화재사범단속반은 절도로 사라졌던 ‘만국전도’와 ‘숭례문’ 목판, 양녕대군 초서(흘림체로 된 한자체) 목판 4점 등 문화재 총 123점을 회수하고,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A(50)씨와 B(70)씨를 각각 입건했다고 29일 밝혔다.

양녕대군 ‘숭례문’ 글씨도 회수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목판과 탁본, 숭례문 실제 현판의 사진. 2008년 화재 후 숭례문을 복구할 때 사용된 건 가운데의 탁본이다. 이번에 찾아낸 건 해당 탁본과 똑같이 제작해 보관하던 목판 2점이다. 김정연 기자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목판과 탁본, 숭례문 실제 현판의 사진. 2008년 화재 후 숭례문을 복구할 때 사용된 건 가운데의 탁본이다. 이번에 찾아낸 건 해당 탁본과 똑같이 제작해 보관하던 목판 2점이다. 김정연 기자

벽지 속에 숨겨놓은 보물 세계지도, 비닐하우스에 쌓아둔 '숭례문' 목판

A(50)씨가 경북 안동 자신의 주거지 벽지 뒤에 숨겨둔 만국전도. 두 번 접어 보관한 탓에 손상이 있었으나 문화재청이 회수 후 복원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A(50)씨가 경북 안동 자신의 주거지 벽지 뒤에 숨겨둔 만국전도. 두 번 접어 보관한 탓에 손상이 있었으나 문화재청이 회수 후 복원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는 1994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함양 박씨 문중에서 도난당한 뒤 25년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문화재청 문화재사범 단속반이 ‘만국전도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첩보를 입수해 경찰과 함께 수사에 착수했다. 만국전도를 팔려고 시도했던 A씨는 수사가 시작되자 한 차례 도주했다. 경찰은 지난해 11월 28일 경북 안동의 A씨 주거지 압수수색에 나섰다. 경찰과 문화재청의 설득에 A씨는 벽지 속에 숨긴 만국전도를 꺼내주며 장물 소장을 시인했다. A씨는 박씨 문중에서 만국전도와 함께 사라진 서적 116점도 차량과 트렁크에 나눠 보관하고 있었다.

함양박씨 문중 에서 만국전도와 함께 도난당한 서적 116점도 A씨가 가지고 있었다. 김정연 기자

함양박씨 문중 에서 만국전도와 함께 도난당한 서적 116점도 A씨가 가지고 있었다. 김정연 기자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초서 목판이 발견된 경기도 양평의 한 비닐하우스 창고.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초서 목판이 발견된 경기도 양평의 한 비닐하우스 창고.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숭례문 목판과 양녕대군의 글씨가 담긴 ‘후적벽부’ 목판은 2008년 전남 담양에 있는 양녕대군 후손의 재실인 ‘몽한각’에서 도난당했다. 경찰과 문화재청은 2017년 10월 ‘숭례문 목판과 양녕대군 글씨가 경매에 나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해 2017년 11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B씨의 비닐하우스에 쌓여있는 목판을 발견했다.

양녕대군이 쓴 '후적벽부' 목판 마지막엔 '숭례문 목판과 함께 지덕사에 보관중인 후적벽부를 중각하여 몽한각(전남 담양 양녕대군 재실)에 보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붉은 네모로 표시된 부분은 '숭례문' '새기다' 지덕사' '몽한각' 단어들. 김정연 기자

양녕대군이 쓴 '후적벽부' 목판 마지막엔 '숭례문 목판과 함께 지덕사에 보관중인 후적벽부를 중각하여 몽한각(전남 담양 양녕대군 재실)에 보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붉은 네모로 표시된 부분은 '숭례문' '새기다' 지덕사' '몽한각' 단어들. 김정연 기자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8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와서 ‘사달라’고 해서 1300만원에 구입했고, 판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도 “2013년에 (2015년 사망한) C씨에게서 500만원에 샀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문화재사범들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에게 샀다’거나 ‘사망한 사람에게 샀다’고 둘러대 추적을 피한다”며 “거래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 다 “도난 문화재인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문화재청은 “도난 문화재는 인터넷에 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 측도 “이들이 거래 불가능한 도난 문화재임을 알고 ‘절도’ 공소시효 10년이 지날 때까지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 위반(문화재 은닉)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만국전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성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김정연 기자

만국전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성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김정연 기자

'북아미리가' 표기한 가장 이른 지도, 땅은 붉고 바다는 푸르게 채색

보물 제 1008호 만국전도.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보물 제 1008호 만국전도.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이번에 되찾은 만국전도는 현대 지도와 똑같은 배치로 5대양 6대주를 표현한 세계지도다. 김성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서양 선교사 알레니가 들여온 소형 세계지도를 1661년(현종 2년) 본떠 확대해 그린 것으로, 국내 민간에서 필사된 세계지도 계열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위원은 "같은 계열의 필사본 3개 중에서도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당시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을 알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지도”라고 설명했다. '북아미리가' '홍해' '대서양' 등의 명칭과 남북회귀선 등 서양식 지도 표기법을 대부분 따랐다. 땅은 붉은색 계열로 대륙별로 다르게 칠하고, 바다는 푸른색으로 칠하고 물결을 그려 넣기도 했다.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과 초서체 '후적벽부'

양녕대군의 글씨가 담긴 목판을 되찾은 소감을 말하는 양녕대군 20대손 이종빈(1944)씨. 김정연 기자

양녕대군의 글씨가 담긴 목판을 되찾은 소감을 말하는 양녕대군 20대손 이종빈(1944)씨. 김정연 기자

조선 4대 임금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1394∼1462)의 글씨가 담긴 숭례문 목판은 2008년 불에 탄 숭례문 복원 때 현판의 본이 된 글씨를 찍어낸 원본 목판이다. 복원 당시에 사용된 건 서울 동작구 양녕대군 묘인 지덕사에 보관돼있던 탁본이고, 이번에 발견된 목판은 전남 담양 양녕대군 후손의 재실(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인 몽한각에 보관돼 있던 것이다. 글씨를 잘 쓰고 각종 기예에 능했던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 탁본도 몽한각에 함께 보관돼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문화재청 문화재사범단속반이 회수한 양녕대군 '후적벽부' 목판 4점. 양면으로 조각돼있어 총 8첩을 찍어낸다. 김정연 기자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문화재청 문화재사범단속반이 회수한 양녕대군 '후적벽부' 목판 4점. 양면으로 조각돼있어 총 8첩을 찍어낸다. 김정연 기자

양녕대군이 쓴 초서 목판으로 찍어낸 탁본. 김정연 기자

양녕대군이 쓴 초서 목판으로 찍어낸 탁본. 김정연 기자

정제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이 목판은 숭례문 서체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자료”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한상진 문화재사범단속반장은 “숭례문 목판 원본을 찾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현장에서 감정위원이 ‘이거 대단한 물건이다’라고 했을 때 정말 짜릿했다”고 전했다. 양녕대군 20대손 이종빈(75)씨는 “너무 찾고 싶었던 터라 말할 수 없이 기쁘고, 문중으로선 큰 경사다”라고 말했다. 16대손인 이승봉(40)씨는 “몇 년 동안 ‘올해는 돌아올까, 돌아올까’ 애태웠고 해외로 유출됐을까 걱정도 했는데 찾아준 문화재청과 경찰에 정말 감사한다”고 심경을 전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 탁본과 목판. 김정연 기자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 탁본과 목판. 김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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