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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넘치는 백수, 판치는 백수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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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소위 '백수 소설' 전성시대다. 청년 백수의 후줄근한 일상을 다룬 소설이 근자에 부쩍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 '청년 백수'는 사회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구조조정 칼바람을 맞은 실업자부터, 실업률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자발적 백수, 요즘 한창 시끄러운 비정규직 노동자(예컨대 편의점 아르바이트, 지하철 푸시맨 등), 그리고 반(半)백수나 진배없는 3류 전업작가까지 포함한 일종의 수사(修辭)다.

최근엔 백수 소설도 제법 다양해졌다. 가령 박민규는 자본주의에 꺾인 청춘들의 한숨을 시끌벅적한 수다 뒤에 쟁여놓았고, 구경미는 지난해 발표한 '노는 인간'에서 자본주의 질서 바깥에 놓인 청년 백수들의 꼬질꼬질한 삶을 헤집었다. 고상한 백수도 출현했다.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소한의 생계만 해결하고 오로지 독서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인테리 백수'가 탄생한 것이다(박주영, '백수생활백서').

그리고 오늘, 또 다른 백수 소설을 만났다. 올해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인 이상운(47)의 '내 머릿속의 개들'(문학동네)이다. 소설은 그 어느 백수 소설보다 '래디컬(radical)'하다. 작가의 경륜마저 느껴진다. 젊은 작가들이 또래의 막막한 오늘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작가는 한참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느낌이다. 박완서 선생이 심사평에 '노회'라고 적은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늙은 소설'은 아니다. 문장은 쫀득거리고 발상은 기발하다. 33세 백수 고달수에게 대학동창 마동수가 오랜만에 전화를 한다. 1000만 원을 줄 테니 자신의 뚱뚱한 아내 장말희를 꼬여달라고 부탁한다. 고달수는 부탁을, 아니 돈을 받아들인다. 소설 막판엔 반전도 대기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의 매력은 딴 데 있다. 자본주의 시대의 삶을 묘사한 몇몇 날 선 구절들이다. 뚱뚱하지만 돈 많은 여성과 결혼한 일을 '고도의 생산성이 보장된 탁월한 합병'이라고 표현하거나 뚱뚱한 아내를 '미학적으로 교환가치가 형편없는 여자'라고 부른 대목은 재기 발랄하다. 하나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팔아먹는 포주들이고, 결국 가련한 소비기계들''결혼식은 새로운 소비자의 탄생을 소란스럽게 선전하기 위한 장치'등의 구절에선 섬뜩한 비판의식도 드러난다. 이 정도면 충분히 '래디컬'하다.

'인간성의 온전한 개화를 위하여 노동은 줄거리가 있는 긴 이야기여야 한다'. 소설이 인용한 막스 베버의 문장이다.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도 할 이야기가 없는, 줄거리 없는 노동에 치여 사는 청춘이 넘쳐나는 한 백수 소설은 한창 더 쏟아질 모양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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