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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의 퍼스펙티브

일본의 관계 복원 움직임에 한국도 긍정 대응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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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한·일 관계 회복의 길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지금처럼 최상의 한·일 관계가 절실한 때가 없었다. 지금처럼 한·일 관계가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는 때도 없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인의 반한 감정을 선동·이용해, 장기 집권하면서 평화헌법의 전쟁 금지 조항 9조 삭제를 우익 정치인으로서의 최종 목표로 추구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성냥불 하나만 던져도 활활 타오르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포기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산으로 끌어안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지자들에게 가시적 성과를 내는 대북 정책과 성과가 애매한 사회복지 정책을 제외하고, 반일 정책이 좋아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계산이라도 해 봤는가.

한·일 관계 최악으로 악화시킨 #초계기·징용배상 문제만 풀려도 #양국 관계 복원의 길이 열리고 #한국은 대북 공조의 동력 얻어

북한이라는 도전적 존재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한·미·일 삼각관계를 생각할 때 이런 외교적·전략적 비정상(anomaly)은 유례가 드물고 이해할 수도 없다. 아베 총리는 한국과의 관계 복원 없이 일본이 미국 쇠퇴의 공백을 메우는 동아시아 지역 패권국이 되는 걸 꿈도 꿀 수 없다. ‘미국의 속국’이라 불리는 일본, ‘트럼프의 푸들’(poodle)이라 불리는 아베 총리의 참여 없는 한반도 평화는 환상임을 문 대통령은 인정해야 한다. 직언하는 참모도 없어 보인다.

코난 도일 탐정 소설 속 주인공 셜록 홈스는 친구요 조력자인 왓슨 박사에게 지금의 이상한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조언을 남겼다. “잘 설명할 수 없는 것(what is out of common)은 대개의 경우 장애물이 아니라 실마리다. 이런 문제 해결에 중요한 것은 소급해 추리(reason backward)하는 것이다.”(코난 도일 『스칼릿 연구』). 문재인 정부와 아베 정부의 한·일 관계를 소급해 올라가면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을 한·일 문제에까지 확대한 것과 마주친다. 거기서 파생된 문제들이 박근혜 정부 때의 위안부 합의 백지화와 징용 희생자 판결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다.

일본으로 가면 아베의 세계관(cosmology)이 있다. 아베 이해의 실마리다. 평화헌법을 전쟁 허용 헌법으로 고쳐 서태평양을 중국과 공동 관리하는 장대한 ‘아베의 꿈’이다. 아베는 그 꿈을 “아름다운 일본”이라고 포장한다.

지금의 평화헌법은 아베와 보수·우익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 ‘국산’이 아니라 ‘미국제’(made in USA)다. 일본은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함 갑판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휘하 참모 중 코트니 휘트니 준장을 팀장으로 한 로스쿨 출신들로 평화헌법 기초를 지시했다. 영어로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일본은 지금 미국인들이 영어로 만들어 일본어로 번역한 헌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헌법 초안을 만든 미군 장교들은 뉴딜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이어서 평화헌법은 그들 가치관의 집대성이다. 미·일 관계를 손상하고 싶지 않은 일본인들은 평화헌법 탄생에 얽힌 자존심의 상처를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2021년 9월 임기가 끝나는 아베는 초조하다. 2년 남짓한 기간에 평화헌법 9조를 삭제하는 개헌은 불가능하다. 2004년 결성돼 일본 전역에 7500여개의 지부를 둔 ‘평화헌법 제9조를 지키는 시민모임’(9조회)은 2007년 아베를 퇴진시켰다. 이듬해 민주당 중심의 연립내각은 동일본 대지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붕괴했다. 아베는 2012년 새로운 꿈을 가지고 정권에 복귀해 안보법제(전쟁법)를 성립시켰다. 그것이 호헌파 시민들을 자극해 2015년 ‘시민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우리가 주권자”라고 외치며 ‘아베 정권 타도’ 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시민연합과 야당은 9조 개정 반대, 안보법제 철회, 보육·교육·고용 정책의 대폭 확충, 8시간 노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사회보장정책 추진, 여성 고용 차별과 임금 격차 폐지 등 진보 정책에 합의했다. 시민연합에는 노동운동도 합류했다. 국내의 이런 사정은 아베에게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릴 동기가 됐다.

아베는 한반도에 착안했다. 김정은과 언제든지 만나겠다는 러브콜을 보냈다. 뉴욕을 포함한 세계 여러 곳에서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를 포함한 고위급들이 북한과 물밑 접촉을 하거나 할 예정이다. 김정은이 문 대통령을 북·미 중재자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대북 강경론자들도 문 대통령이 김정은의 이익만 대변한다고 인식하는 지금 트럼프에게 말 잘 듣는 아베는 문 대통령보다 북·미 중재자로 더 적임자로 보일 수 있다.

아베가 문 대통령의 북·미 중재자 역할을 가로챈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면 아베는 문재인 정부에 북한 카드를 휘두를 수 있다. 김정은은 아베를 통해 북·미 교착 상태를 풀고, 동시에 최고 300억 달러의 식민지 지배 배상을 받을 수 있는 북·일 수교까지 내다볼 수가 있다. 한국은 북·일 관계 진전과 국교 정상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을 활용해야 한다.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북한 핵·미사일의 위협을 받고 있다. 아베는 미국 동의 없이 대북 제재에 큰 구멍을 내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소급 추리로 당도한 아베의 이런 움직임에 한국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일본의 외교 이니셔티브가 돌연 활발해졌다. 이와야 다케시 일본 방위상이 한국과의 관계를 “원래대로 돌리고 싶다”고 말한 제안을 환영한다. 한국 해군 초계기의 레이더 조사(照射) 논란을 풀 실마리로 살려야 한다. 이 사건은 간단한 조사와 해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아베 정부가 의도적으로 키운 것이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6월 싱가포르 샹그릴라 회의에서 이와야 방위상과 이 문제를 풀고 와야 한다.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도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민감한 이슈로 커져 버렸다. 일본은 지난 20일 중재위원회를 열자고 제안해 왔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대로 하면 먼저 양국 정부 간 협의를 한다. 거기서 합의가 안 되면 제3국의 위원을 포함한 3명의 중재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의한다. 거기서도 합의에 실패하면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간다. 그렇게 보면 일본의 중재위 제안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위한 명분 쌓기로 보인다.

한국의 입장은 “신중 검토”다. 그러나 신중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중재위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국제사법위원회에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 원래의 원칙이다. 징용 피해자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는 달리 사죄는 필요 없이 법원의 판결대로 배상만 하면 끝나는 돈 문제다.

소급 추리를 하면 징용자들에게 노예 노동을 시킨 일본 기업이 배상하겠다고 했다. 그걸 아베 정부가 한·일 갈등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한 게 문제의 발단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반도 정세, 김정은의 어리석은 남한 고립 작전, 워싱턴 조야에 팽배한 문재인 정부 불신 등을 고려하면 지금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밀어 넣고 있는 현안들의 해결을 서둘러야 한다.

한 한·일 관계 권위자는 한국 정부와 문제의 일본 기업들, 그들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 3자가 기금을 조성해 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의 추산에 따르면 배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생존 피해자는 1000여명이다. 3자가 1000억원을 출연하면 소송 비용을 제외한 배상액을 마련할 수 있다.

포스코는 이미 60억원을 출연한 상태다. 문제의 일본 기업들은 배상 용의가 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가 강경해 정부 뒤에 숨어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3자 출연 방식을 수락하도록 설득만 하면 된다. 유감인 것은 한국에 공식·비공식적으로 일본을 설득할 인적 자산이 고갈되었다는 점이다. 초계기 조사와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만 풀려도 한·일 관계 복원의 문이 열리고, 한국이 일본의 북한 접촉을 지지·지원하면서 대북 공조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오는 6월 오사카 G20 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재앙적 사태다. 그러면 한국은 동북아의 외톨이가 되고 한·일 관계 복원은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 임기 중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김영희 중앙일보 명예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