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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마루에 소파·조각보…현대와 어우러진 운경고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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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호 18면

지난달 30일 오후. 사직공원 앞을 지나 대로변 찻길에서 조금만 올라갔는데도 어느새 고즈넉한 분위기다. 담벼락으로 고개를 내민 연분홍 라일락에 인사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런 한옥과 연못이 한눈에 들어왔다.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雲耕) 이재형(1914~1992) 선생이 살던 운경 고택이다.

장응복·하지훈 디자이너 2인전 #선조 후손 운경 이재형 살던 곳 #닫혀있던 문 처음 대중에게 열어 #옛 정취 담아낸 현대식 기물 #고즈넉한 집안과 멋스런 조화

이곳은 조선 14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살던 도정궁 터에 세워진 한옥인데, 운경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후손으로 1953년부터 여기서 지냈다. 운경 타계 후 후손들은 운경재단을 만들어 이곳을 보존·관리해 왔는데, 그동안 닫혀있던 문이 이날 처음으로 대중에게 열렸다. ‘차경(借景), 운경고택을 즐기다’라는 제목의 전시(5월 1~31일)를 위해서다. 텍스타일 디자이너 장응복(모노콜렉션 대표)과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계원예술대 교수)이 이 고택에 어울리는 공예 작품을 만들고 공간 연출까지 마무리했다.

안채 건넌방에 전시된 장응복 작가의 ‘백자호 지장’‘소반다리 화문석’ ‘보료와 잇기이불’, 하지훈 작가의 ‘호족평상’‘원형반’ ‘달조명’, 두 작가가 협업한 ‘삼각침’. [사진 운경재단]

안채 건넌방에 전시된 장응복 작가의 ‘백자호 지장’‘소반다리 화문석’ ‘보료와 잇기이불’, 하지훈 작가의 ‘호족평상’‘원형반’ ‘달조명’, 두 작가가 협업한 ‘삼각침’. [사진 운경재단]

대청 마루로 올라가니 뒷뜰이 보이는 창호문 옆에 진초록 소파 2개가 시선을 붙든다. 그 사이에는 둥근 유리 테이블을 황금빛 거북이가 기둥처럼 받치고 있는 형상의 테이블과 둥근 참나무 상을 금속통으로 받친 현대식 소반을 배치했다. “이 소파는 나주 소반의 스타일을 응용한 것입니다. 알루미늄으로 팔걸이와 구조를 만들어 무게를 견디도록 했죠. 금박 장식의 유리 테이블은 일주반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것이구요. 둥근 소반은 화이트 오크를 탄화시켜 깊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지훈 작가의 설명이다.

안방 창가에 걸린 푸른 산수화 같은 장응복 선생의 조각보가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백자의 문양을 다양한 색으로 구현하는 선생 특유의 프린트를 활용해 만든 하얀색 종이 우산과 종이 장롱(백자호 지장, 소슬모란 지장)이 주는 질감이 색다르다. 장롱의 팽팽한 종이를 톡 쳐보니 “쩡”하는 소리가 났다.

사랑채 툇마루에 놓인 하 작가의 ‘호족반’. [사진 운경재단]

사랑채 툇마루에 놓인 하 작가의 ‘호족반’. [사진 운경재단]

건넌방 바닥에 장 선생의 백자 문양 패브릭으로 하 작가가 만든 등받이가 눈길을 끌었다. “앉아있다 보면 기대고 싶은데 그럴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삼각침입니다. 일종의 의자 등받이죠. 한번 기대 보세요. 편하고, 밀리지 않습니다.” 과연 그랬다. 밀리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 슬쩍 뒤집어 봤더니 고무 패드가 붙어있다.

하지훈 작가의 ‘장석장’. [사진 운경재단]

하지훈 작가의 ‘장석장’. [사진 운경재단]

툇마루 맨 끝에 혼자 서 있는 검정색 장이 독특했다. 옛날 장롱 표면 구석마다 붙어있던 삼각형·원형 장석을 전면 곳곳에 여럿 붙여놓았다.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가 “왠지 루이비통 느낌이 나는데”하고 중얼거렸다. “V라인이 돋보여서 그럴 겁니다. CNC(자동 공작기계)를 이용해 장석이 들어가는 곳마다 조금씩 파고 은박을 씌워 끼웠죠. 이게 원래 이케아입니다. 럭셔리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도를 담았어요”라고 하 작가가 답했다.

사랑채로 들어가니 쪽빛 염색이 예쁜 장 선생의 샹들리에가 관람객을 맞고 있다. “하 작가와는 10년 전 호텔 프로젝트를 같이한 인연이 있어요. 요즘 공예를 현대 생활에 많이 접목하지만 이번에는 전통 한옥에 맞춰서 실용과 자연스러움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죠. 지난해 8월부터 한 달에 한 번쯤 만나 차 마시고 작품 얘기하며 여유를 갖고 준비했습니다. 이 공간에 담긴 역사를 오롯이 담아내고 싶었어요. 작품도 처음엔 여기저기 많이 배치했다가 다시 다 뺐어요. 과하지 않게.” 장 디자이너의 설명이다.

전시를 준비한 이미혜 운경재단 이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학재단을 운영하며 건물을 관리만 해왔는데, 이번에 좋은 분들이 너무나 많이 도와주셔서 멋진 전시가 됐다”며 “작품 판매 수익금과 입장료는 모두 재단에 기부된다. 사랑채의 당호가 긍구당(肯構堂)인데, ‘조상의 유업을 잘 계승발전시킨다’는 당호의 의미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매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전 예약제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된다. 입장료 1만원을 내면 차가 제공된다. 2019 공예주간(17~26일)에는 쉬는 날 없이 진행된다. 토요일마다 작가와의 대화, 게스트 대담, 체험 프로그램, 특별 강연이 이어진다.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요리연구가 노영희, 이혜진 옥인다실 대표, 기업인 마크 테토가 나선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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