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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삼성의 위기극복 DNA 기억해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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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단독 인터뷰] 사표 던진 이기인 전 르노삼성차 부사장

“르노삼성차 역사에 새겨진 ‘위기극복 DNA’를 기억해 달라. 노동조합(노조) 집행부도 르노삼성차 가족이 아닌가.”

이기인 전 부사장 마지막 당부 #한·일·미 공장서 만든 똑같은 차 #프랑스 본사, 마당 세워놓고 비교 #고품질 땐 물량 배정받을 수 있어 #노조, 게임도 하기 전에 포기 안 돼 #“어떤 위기도 자력으로 극복해와 #GM·쌍용차와 다르다는 자부심”

이기인(60) 전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부사장)의 퇴임 일성(一聲)이다. 그는 24일 부산광역시 강서구 르노삼성차 부산공장 인근에서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했다.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응한 이기인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은 사임 후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는지 활짝 웃어보였다.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응한 이기인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은 사임 후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는지 활짝 웃어보였다. 문희철 기자.

르노삼성차는 장기간 노사갈등으로 진통을 앓고 있다. 지난해 6월 첫 상견례 이후 10개월째 임금및단체협상을 타결하지 못했다. 62차례(250시간) 부분파업이 발생하면서 2806억원(1만4320대)의 손실이 발생했다. 사태가 확산하자 사측은 휴가 제도를 활용해서 29일부터 사흘간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이기인 전 부사장은 “노사협상 돌파구를 찾고 회사가 살아나려면 ‘충격요법’이 필요했다”고 사퇴를 결심한 이유를 밝혔다. 마음속으로 은퇴를 굳힌 12일 그는 여느 때처럼 회색 작업복을 입고 아침 7시 30분부터 부산공장을 시찰했다. 차체공장 휴게실에서 붓펜을 들고 A4용지를 꺼내 ‘부산공장을 떠나며…’라는 이름의 손편지를 써내려갔다. 노사분규가 부산공장 고용에 치명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업 시작부터 비판 여론…품질로 넘어서

삼성그룹의 비공개 '완성차 공장 설립' 보고서

삼성그룹이 자동차 산업 진출을 준비하면서 작성했던 ‘PS건설계획’ 보고서. 닛산차와 공동으로 제작해서 일본어로 작성했다. 문희철 기자.

삼성그룹이 자동차 산업 진출을 준비하면서 작성했던 ‘PS건설계획’ 보고서. 닛산차와 공동으로 제작해서 일본어로 작성했다. 문희철 기자.

‘PS건설계획’에서 초기 생산 모델로 지정한 3개 차종. SM5 518·520(개발명 KPQ1)과 SM5 525(개발명 KPQ2), 준중형세단 SM3(개발명 KHF). 삼성자동차는 이후 이 차종을 모두 실제로 출시했다. 문희철 기자.

‘PS건설계획’에서 초기 생산 모델로 지정한 3개 차종. SM5 518·520(개발명 KPQ1)과 SM5 525(개발명 KPQ2), 준중형세단 SM3(개발명 KHF). 삼성자동차는 이후 이 차종을 모두 실제로 출시했다. 문희철 기자.

삼성자동차는 기본 방향을 기록한 ‘PS건설계획’ 보고서. '품질'을 가장 강조했다. 문희철 기자

삼성자동차는 기본 방향을 기록한 ‘PS건설계획’ 보고서. '품질'을 가장 강조했다. 문희철 기자

삼성그룹이 94년 작성한 ‘PS건설계획’에는 현재 르노삼성차 부산공장 기초설계도가 있다. 문희철 기자.

삼성그룹이 94년 작성한 ‘PS건설계획’에는 현재 르노삼성차 부산공장 기초설계도가 있다. 문희철 기자.

그는 삼성그룹이 맨땅에 자동차 공장을 청사진을 그릴 때부터 르노그룹이 공장을 인수할 때까지 16년 흥망성쇠를 지금까지 현직에서 지켜본 유일한 임직원이다. 오롯한 역사의 산증인인 그는 “▶삼성의 품질 강박 ▶닛산의 기술력 ▶르노의 합리성과 자부심이 르노삼성의 DNA에 새겨있다”며 “르노삼성차 기업노조 집행부가 우리의 DNA를 되새겨야 부산공장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기인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 [사진 이기인 제공]

이기인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 [사진 이기인 제공]

르노삼성차는 태생부터 논란이었다. 1992년 삼성그룹은 자동차 사업 진출을 준비한다. 당시 삼성중공업에서 자동차 사업을 추진하던 비밀조직(캠팀)이 완성차 전문가를 스카우트했는데, 이중 한 명이 기아차에서 일하던 이기인 부사장이다. “10조짜리 20세기 최대 신사업 프로젝트에 동참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당시 국내·외 여론은 삼성그룹의 자동차 산업 진출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삼성자동차는 품질로 비판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그가 아직 간직하고 있는 ‘PS건설계획(建設計画)’ 보고서는 삼성자동차 설립 기본 방향으로 ‘품질을 기본으로 비효율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기본 사상…모든 종업원은 품질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PS건설계획은 삼성그룹이 1994년 9월 작성한 완성차 공장 설립계획이다(사진 참조).

르노삼성차 연도별 생산대수. 그래픽 = 차준홍 기자.

르노삼성차 연도별 생산대수. 그래픽 = 차준홍 기자.

실적 악화하는 르노삼성차. 그래픽 = 차준홍 기자.

실적 악화하는 르노삼성차. 그래픽 = 차준홍 기자.

최근 르노삼성차는 일감 절벽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과거 이야기를 꺼낸 건 현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품질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는 “프랑스 본사는 한국부산·일본큐슈·미국스미르나공장에서 각각 만든 똑같은 차(닛산 로그)를 뒷마당에 세워두고 비교한다. 이때 불량건수·서비스건수 등 각종 품질 데이터가 공장별로 나온다. 결국 다른 공장보다 품질 경쟁력이 뛰어나야 로그 후속 물량을 배정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르노삼성, 물량 추가 확보 가능” 

노조 집행부는 ‘사실상 본사 물량 배정은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큐슈공장에서 로그 후속 모델을 생산하기로 내정했다고 본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닛산차 큐슈공장은 임직원 월급을 20% 삭감했고, 고급 브랜드 인피니티와 전기차를 생산하는 오파마공장과 중소형 차량을 제조하는 도치키공장도 각각 2개의 생산라인 중 하나씩을 멈춰 세웠다. 일본에서 생산할 일감도 부족한데 한국에 물량을 건네주지는 않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기인 전 부사장 생각은 다르다. “노조가 게임을 시작하지도 않고 포기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여기서 르노삼성차의 역사를 다시 꺼냈다. 국제통화금융(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월 삼성자동차는 자사 최초의 차량(SM5) 출시를 불과 두 달 앞두고 완전자본잠식에 빠진다. 이때 당시 정부가 계열사간 지원을 금지한다. 그에 따르면, 삼성자동차는 삼성전자·삼성중공업으로부터 매년 1조2000억원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정책 변화로 갑자기 자금줄이 끊겼다. 매달 1000억원씩 갚지 않으면 당장 공장에 차입딱지가 붙을 판이었다.

'고객의 소리'를 유선으로 청취하고 있는 이기인 전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 [사진 르노삼성차]

'고객의 소리'를 유선으로 청취하고 있는 이기인 전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 [사진 르노삼성차]

다들 IMF같은 위기 상황에서 한국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할 간 큰 인수자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전 부사장 등 5명의 삼성자동차 특수팀은 007 가방에 팬티만 담고 지구 40바퀴 순환 거리(110만마일·177만㎞)를 비행하면서 수소문했다. 결국 1998년 12월 인수자(르노자동차)를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르노삼성차가 ‘위기극복 DNA’를 새겼다는 게 이 부사장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까지 르노삼성차는 모든 위기를 자구노력으로 극복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와 협상해 세금을 투입한 한국GM이나 법정관리로 살아난 쌍용차와는 차원이 다른 기업이라고 선을 그었다.

노조 “살인적 노동강도” vs 이기인 “오히려 편해져”

이기인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은 노사관계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자신의 논문을 읽고 있다. 문희철 기자.

이기인 르노삼성차 제조본부장은 노사관계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자신의 논문을 읽고 있다. 문희철 기자.

노조에 서운한 감정도 토로했다. 노조는 ‘살인적 노동 강도’를 근거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2015년(20만5000대)보다 지난해(21만6000대)이 생산량이 늘었지만, 근로자(3700명→2400명)는 오히려 줄었다는 게 근거다. 하지만 이 전 부사장은 “공정개선에 투자해서 생산성을 개선한 덕분에 근로자 노동 강도가 오히려 감소했다”고 맞섰다. 그는 “같은 기간 근로자 작업동선(하루 1만보→5000보)이 줄었고, 일평균 여유시간(3000초·50분)도 증가했다는 것이다. 또 “(명예퇴직이 아닌) 자발적 퇴사자가 0명이라는 사실도, 노동강도가 살인적이지 않다는 간접적인 증거”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르노삼성차 노사관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르노삼성차는 국내 여느 자동차 제조사와 완전히 다른 ‘노사관계의 모범사례’를 써왔다”며 “삼성·르노·닛산의 DNA를 새긴 르노삼성차 후배들이라면, 이번 사건(본인의 사퇴)을 계기로 갈등을 원만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부산 =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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