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오지랖’에 맞서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을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지켜봤다. 백악관 출입기자들과 함께였다. 안쓰럽기도 하고 솔직히 화도 났다. 청와대는 김정숙 여사와 멜라니아 여사가 오벌오피스 단독회담에 배석하는 걸 “문재인 대통령 부부에 대한 예우”라고 했다. 파격이라고들 했다. 그랬을까. 29분간의 단독회담, 아니 트럼프의 원맨쇼가 진행되는 내내 김 여사는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뮬러 특검 보고서가 어떻고,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 후보자가 누구고 하는 질문에 트럼프가 신나게 답하는 동안 편치 않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시선을 둘 곳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손님을 불러놓고, 그것도 퍼스트레이디를 동석시켜놓고, 이건 예우가 아니다. ‘트럼프 스타일’만 탓할 게 아니다. 2년을 지켜봐 왔으면 제대로 준비를 해야 했다. 지난해 5월 ‘34분 원맨쇼’를 당하고도 나아진 게 없다.

김정은 시정연설 ‘희망 해석’ 금물 #형편되는 대로 만나도 결과 의문 #흐름 쫓지 말고 흐름 바꿀 궁리를

어디 의전뿐이랴. 조기 수확론은 “3차 회담은 단계적으로 가겠다”로, 스몰딜은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로 부정당했다. 입장 차만 뚜렷해졌다. ‘와이즈맨(현인)’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해리먼 전 주영 미 대사는 “정상회담은 언제나 정중하다. 서로 욕하는 건 외교부 장관 몫”이라 했다. 정상들이 실속을 챙기도록 실무준비는 치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 회담은 실무준비도, 정상회담도 엉성했고, 또 정중하지도 못했다. 우리 국격, 국민 자존심도 생각해야 했다. ‘중재 강박’에 빠진 우리 외교의 현주소다.

문 대통령이 귀국한 지 10시간 뒤 북한은 “남조선당국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김정은 연설을 발표했다. 전날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공개를 문 대통령 도착 뒤로 교묘히 맞췄다. 의도적이다. 문 대통령의 중재 외교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뿐 아니다. 김정은은 “앞으로 조미(북미) 쌍방의 이해관계에 다 같이 부응하고 공정한 내용이 지면에 씌어져야 합의문에 수표(서명) 할 것”이라 못을 박았다. ‘톱다운’이 아니라 ‘보텀업(실무자 간)’을 하겠다는 뜻이다. 실무선에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합의문이 나와야 트럼프를 만나겠다는 말이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조기 북미 3차 정상회담’을 외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위해 ‘톱다운’이 필수임을 확인했다”고 강조한 청와대의 메시지가 무색하게 됐다. ‘조급 외교’의 대가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15일 “김정은 위원장은 시정연설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안팎으로 거듭 천명했다. (중략) 김 위원장의 변함없는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크게 환영한다”고 말했다. 시정연설문을 몇번이고 다시 읽어봤다. 어디에도 핵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비핵화란 단어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해석, 환영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행간’을 읽었다 해도 지나친 희망적 사고다. 그 결과가 지금 미국에 퇴짜 맞고 북한에 지적질 받는 신세다.

“북한의 형편이 되는 대로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만나자”는 대통령의 무조건적 구애(求愛)는 대북 전략의 실패를 상징한다. 그렇게 만나봐야 결과는 뻔하다. 이제는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란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제 길’을 찾을 수 있다. 지난 1년의 흐름에서 한 발짝 벗어나 앞으로 1년 흐름을 뒤바꿔 보려는 궁리들을 해야 한다. 집단최면에서 깨어나야 창의적 해법도 나온다.

영국의 저명한 정치역사학자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저서 『정상회담』에서 정상회담이 깨질 수밖에 없는 원인 중 몇몇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선순위가 명백해서 패가 다 보일 때 ▶듣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들어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잘못된 가정과 과장된 정당성, 설득력을 맹신해서 무모한 시도를 할 때. 마치 우리에게 주는 교훈 같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