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無我之境<무아지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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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호 29면

한자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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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경(無我之境)은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 무엇이 나(我)고 무엇이 사물인지 알 수 없다.”

중국 청(淸)나라 말기의 대학자 왕국유(王國維) 선생의 설명이다. 시문 비평집 『인간사화(人間詞話)』에 나온다. “유아지경(有我之境)은 내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 그래서 사물이 모두 내 색채로 물든다”는 문장과 대비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무아(無我) 발언이 논란이다. ‘신조어(新詞)’ 정치에 새로운 어휘를 추가했다. ‘중국몽’, ‘공급측개혁’, ‘일대일로(一帶一路, 21세기 육·해상 신실크로드)’, ‘인류운명공동체’ 등의 계보를 잇는다.

지난 3월 22일 이탈리아를 방문한 시진핑 주석은 차세대 정치인 로베르토 피코(45) 하원의장을 만났다. 피코 의장이 말했다. “호기심에 묻는다. 국가주석에 당선됐을 때 심정이 어땠나?” 시 주석은 “큰 나라의 책임은 무겁다. 업무도 막중하다. 나는 장차 내가 없다. 인민을 저버리지 않겠다(我將無我 不負人民·아장무아불부인민)”고 대답했다. 이어 “‘무아’ 상태에서 중국의 발전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길 원한다”며 “나의 노력과 전 중국 13억 인민의 육력동심(勠力同心·힘과 마음을 함께 합치다)으로 나라를 잘 건설하리라 믿었다. 자신 있다. 중국에 와서 근면하고 지혜로운 중국 인민을 보라.” 피코가 대답했다. “꼭 가겠다.” 3월 24일 자 인민일보에 실린 시 주석의 ‘무아지경’ 각오다. 반향은 컸다. 류츠쿠이(劉賜貴) 하이난(海南) 당서기는 이튿날 확대 학습 회의를 소집했다. “‘아장무아불부인민’ 정신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자”가 주제였다. 공산당신문망은 “공산당원이 말하는 ‘무아’는 종교가 말하는 희생보다 훨씬 높다. ‘무아’란 단어의 새로운 해석이자 새로운 용법”이라고 치켜세웠다.

정치평론가 덩위원(鄧聿文)은 시 주석의 신조어 통치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과 비유한다. 덩은 최근 “중국몽은 공산당이 통치하는 붉은 제국이 세계적으로 굴기(崛起·우뚝 섬)하고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중국 부흥”이라며 “‘인류운명공동체’도 사기성이 있으며 ‘아장무아’도 예외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소설 속 ‘빅 브러더’는 신어(Newspeak)를 만들어 생각을 통제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과 같은 식이다. 베이징에서 접하는 공산당 매체의 글들이 갈수록 소설 『1984년』를 닮아간다.

신경진=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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