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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함으로 승부하는 마술의 시대는 끝”…마술 장르 첫 예술의전당 공연 앞둔 이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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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결 마술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은결 마술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마술은 영화가 나오면서 위기를 맞았고,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보화 시대에 마술의 비밀을 감출 수 없다. 댓글에 나와있는 마술의 비법이 다 맞는 얘기다.”
마술사 이은결(38)의 진단에 따르면 마술의 시대는 끝이 났다. 누구도 초능력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 관객을 깜짝 놀라게할 여지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마술 공연은 날이 갈수록 성황이다. 2010년 초연해 총 공연 횟수 1000회,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넘긴 그의 대표작 ‘더 일루션’이 오는 5월 17일부터 6월 9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펼쳐진다. 마술 장르 공연이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술의 비밀이 다 공개된 세상에서 마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공연 준비 중인 그를 만나 물었다.
그는 “마술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마술의 출발은 주술이었다. “불규칙한 카오스 상황에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가상의 세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마술이 만들어낸 ‘가상’을 통해 사람들은 때론 위안을, 때론 비전을, 때론 희망을 얻었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 논리적인 세상에서 그 규칙을 뒤집어놓는 쾌감이 필요하다. 그 역할 역시 마술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꼽은 마술의 3요소는 ‘트릭(원리)’ ‘매니퓰레이션(기술)’ ‘미스디렉션(주의 돌리기)’이다. 과학적 원리에 따라 기술 연기를 하면서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마술이라는 것이다. 그의 마술 공연에서도 이런 마술의 본질은 그대로다. 하지만 “신기한 쇼를 보여주는 것보다 메시지로 감동을 전하는 것”에 그는 초점을 맞춘다. 그는 “작품의 메시지를 관객들의 마음 속에 각인시킬 수 있는 이미지를 마술로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마술 인생 원년을 마술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1996년으로 꼽고 있다. 그에 맞춰 2016년에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도 펼쳤다. 그는 “교실 안에서 있는 둥 없는 둥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 중학생 때 마술을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마술을 하면서 달라졌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다보니 내가 이렇게 즐거우면서 남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직업이 몇 개나 될까 싶더라. 꼭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마술사가 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술 시작 5년 만인 2001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마술대회 ‘UGM대회’에서 우승했고, 2006년 마술올림픽으로 불리는 FISM에서 1등을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마술사 자리에 올랐다. TV 코미디 프로그램 ‘폭소클럽’에 2002년부터 1년 남짓 고정 출연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도 쌓았다. 마술사로서 그는 줄곧 ‘꽃길’만 걸은 셈이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2006년쯤 ‘마술사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다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무슨 꿈을 꾸지’란 고민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더 일루션' 공연 사진. [사진 EGPROJECT]

'더 일루션' 공연 사진. [사진 EGPROJECT]

‘더 일루션’은 그가 3년 여의 고민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순수’라는 주제 아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순수한 눈에만 열려있는 무궁한 가능성의 세계를 마술로 표현하는 공연이다. 철학적 배경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낙타-사자-어린아이’ 비유에서 얻었다. 인간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수동적인 낙타, 저항하는 사자, 자유롭고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3단계로 설명한 비유다. 그는 “삶을 놀이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어린아이의 단계가 바로 ‘더 일루션’이 담아내는 세계”라고 말했다. ‘더 일루션’에선 미디어아트ㆍ드로잉ㆍ마임 등 다양한 예술 장르와의 협업이 두드러진다. 헬리콥터가 무대에 등장하는 초대형 마술, 그의 두 손으로 아프리카 초원을 재현한 그림자 극,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메타 일루션’  등을 통해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는 “나의 상상력과 관객이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 ‘더 일루션’ 공연을 보고 나면 마술의 충격ㆍ놀라움보다는 짙은 감동의 여운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나라의 대표 마술사로 꼽히는 그는 “‘더 일루션’이 후배 마술사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술 플랫폼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신기함ㆍ초능력 등 마술의 틀을 깨는 전위적인 운동, 기존 질서와 기준을 전복시키는 실험적인 움직임이 마술계에 필요하다”고 덧붙이면서다. 그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할 계획이다. “내 범위를 스스로 제한하고 싶지 않다”는 그는 ‘마술사 이은결’이 아닌 ‘작가주의 예술가 EG’란 이름으로도 활동하며 창작 무대를 넓혀가고 있다. ‘멜리어스 일루션’(2016), ‘푼크툼’(2018) 등 마술을 기반으로 했지만 마술이라도 규정하긴 어려운 복합 공연들이 그동안 발표한 ‘EG’의 작품들이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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