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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라" 대신 "○○로 가라"…산불 매뉴얼 이렇게 바뀌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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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화재로 전소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위치한 요양센터 부지에 남겨진 강아지 가족. 장진영 기자

6일 오후 화재로 전소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위치한 요양센터 부지에 남겨진 강아지 가족. 장진영 기자

지난 4일부터 고성·속초·인제 등 강원도 일대를 집어삼킨 초대형 산불이 진화됐다. 조만간 피해 지역 및 이재민에 대한 복구, 지원 활동이 본격 시작된다.

이번 산불은 신속한 대응3단계 발령, 국가재난사태 선포 등 적극적 조치로 14시간에 주불을 진화하는 등 산불 대응능력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지금까지 강원도 대형 산불과 비교해 인명·재산 피해가 작았다. 전문가들은 “이제부터는 사고 경감과 대비에 초점을 맞춘 복구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긴급 행동요령은 ‘단순하게’

강릉시 옥계면에 사는 유모(67)씨는 5일 새벽 2시쯤 “대피하라”는 소리를 듣고 황급하게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처음엔 유씨를 포함해 대여섯 명이 옥계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씨는 “그때 갑자기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면사무소로 가라고 해서, (면사무소에) 가보니 이번엔 잠시 복도에 서 있으라고 했다. 조금 지나니까 크리스탈밸리로 대피하라고 했다”며 “네 가족이 30분 남짓을 허비해야 했다”고 말했다.

인근 남영리에 사는 김모(66)씨도 거대한 불길 앞에서 우왕좌왕해야 했다. 김씨는 “밤 12시40분께 경찰이 문을 두드리면서 ‘빨리 피하라’고 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이 없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4일 밤늦게 강릉시민들에 긴급문자 또는 방송이 이뤄졌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불이 났다’는 내용이라 일부 주민들은 어디로 대피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행정안전부 지침은 시·군·구에서 화재 신고가 들어오면 광역시·도 승인을 거쳐 ‘언제, 어디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문자를 전파하게 돼 있는 게 전부다.

정상만 공주대 환경건설공학부 교수(한국방재학회장)은 “산불이 나면 불의 반대 방향에 있는 ○○○로 모인다” 같이 단순한 메시지로 행동 매뉴얼을 통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심에서는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배천직 전국재해구호협회 재해구호팀장은 “이번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바닷가로 밀려왔다”며 “특히 가장 취약한 야간 시간대에 일어나 전혀 훈련이 안 된 주민들이 큰 혼란을 겪었다. 초동 대피와 관련해 분명한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4일 강원도 지역에 발생한 화재로 피해를 입은 강릉 옥계면 인근 야산의 7일 오후 모습. 장진영 기자

지난 4일 강원도 지역에 발생한 화재로 피해를 입은 강릉 옥계면 인근 야산의 7일 오후 모습. 장진영 기자

최악 조건에선 ‘비상 대책’을

동해안 벨트엔 봄마다 이른바 양간지풍(襄干之風·영서에서 영동지역으로 부는 강한 바람) 현상으로 초속 20~30m의 강풍이 분다. 올해는 극심한 가뭄이 겹쳤고, 이번 산불은 오후 늦은 시간에 발생했다. 야간에는 헬기를 띄우기 어렵고, 강풍이라 드론도 소용없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산불이 대형화하기 좋은 조건을 모두 갖췄다”며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는 특수 소화(消火)약제를 사용하거나 산불 지연제를 미리 뿌려놓으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소화약제는 포(계면활성제 성분의 거품으로 화염을 덮는 제품)나 액상 형태로 불을 끄는 역할을 한다. 지연제(retardant)는 인산암모늄과 황산암모늄이 주성분으로 산불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준다. 미국과 캐나다 등에선 불길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방화선(防火線)을 만들 때 주로 쓰인다. 다만 환경 파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산림과학원은 지난해부터 소화약제와 지연제를 개발 중이다. 이병두 산림과학원 박사는 “소화포는 이번 산불 때 진화 헬기에 적용했으며 지연제는 생태계에 미치는 독성 지침을 만족시키는 제품을 개발 중”이라며 “2022년까지 현장에 적용한다는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창우 교수는 “군부대 사격장이나 지뢰 설치 지역에 지연제를 미리 살포해두면 화재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대형 산불 때는 드론을 활용해서 소화탄과 지연제를 떨어뜨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꺼번에 3t의 화재 진압용 물을 실을 수 있는 초대형 헬기를 추가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대당 200억원대로 가격이 비싼 데다 가동률이 떨어진다는 지적 때문에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산불 진화의 핵심 장비인 대형 헬기는 전액 국비로 지원해야 마땅하다”며 “소방직의 실질적 국가직 전환으로 인력·장비를 대폭 보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 교수는 “현행 소방 국가직 전환은 예산도, 지휘권도 지방자치단체에 남겨두는 방안으로는 효과가 떨어진다”며 “강원도의 경우 소방공무원이 충원율이 70%대, 1인당 관할 면적은 5㎞로 전국에서 가장 넓다. 이래서는 전국에서 동일한 소방·안전 서비스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5일 오후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에서 산불 피해를 입은 이재민이 시름에 잠겨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5일 오후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에서 산불 피해를 입은 이재민이 시름에 잠겨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복구 과정부터 ‘사고 대비’해야  

이번 피해 지역은 주로 소나무와 잎갈나무(낙엽송), 잣나무 등이 울창한 산림이었다. 특히 솔방울은 1㎞까지 날아다니면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정상만 교수는 “같은 재난이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조림 시작 단계부터 신중히 해야 한다”며 “강원도 일대는 장기적으로 수종 개량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나무나 은행·동백나무 등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무로 숲에 ‘띠’를 둘러 내화(耐火)수림대를 조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토지와 지형, 식생 특성상 한계가 있다. 박도환 산림청 산불과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인공 조림을 할 때 내화수림대를 만들고 있다”며 “다만 솔 씨앗이 날아와 자연 발생적으로 소나무가 자라는 등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7일 오후 4시 기준으로 5개 시·군에서 주택 487채, 창고 75채, 비닐하우스 59동이 불에 탔다. 한우·꿀벌 등 가축 피해도 4만1518마리에 이른다. 하지만 농작물이나 가축 재해보험에 가입한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정상만 교수는 “아무리 정부가 보상한다고 해도 주민들의 경제적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며 “향후 농어민 등에게 재해보험 가입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재난 저감·대응 단계에서 예산의 70~80%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현재 우리는 70% 이상을 복구·지원에 쓰는 구조다. 이러면 안전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상재 기자, 강릉=편광현 기자 lee.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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