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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희 ‘파리 사랑방’서 사랑받던 양 넓적다리구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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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호 22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마대그림의 미술가

마대그림으로 유명했던 신성희가 누아주(묶기)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사진 정이녹]

마대그림으로 유명했던 신성희가 누아주(묶기)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사진 정이녹]

1980년대의 한국인에게 프랑스는 너무나 멀고도 아득한 곳이었다. 화가 신성희(1948~2009)는 한국에서의 교직생활을 접은 후 파리로 향했다. 1980년이었다. 나중에 건축가가 되는 형철과 패션디자이너가 되는 혜리가 6살, 4살 때였다.

김한·유준상·오광수·이우환 등 #유럽 찾는 미술인들의 베이스캠프 #신성희 와인 감식력, 소믈리에 뺨쳐 #부인 정이녹의 양 구이 요리도 별미 #“좋은 음식 먹어야 좋은 작품 가능” #서울 오면 냉면·만두·칼국수집 순례

그들은 파리 15구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에 사는 한국인이 몇 안 될 때였다. 예전에는 타지를 가면 친척 집이나 친구 집을 찾아가 며칠이고 신세를 지던 살가운 공동체문화가 있었다. 파리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다 귀하게 유럽 여행의 기회를 얻어 파리를 찾는 한국의 미술인들은 무조건 신성희를 찾았다. 막막한 도시 파리에서 15구에 위치한 신성희의 거처이자 아틀리에는 한국 미술인들의 유럽여행 베이스캠프가 되어 주었다. 도심에 가까워서 접근성이 좋았다.

신성희의 집 방 한구석은 한국에서 날아온 여행객들이 맡기고 간 큰 가방들이 교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인 정이녹은 신성희와 함께 홍익대 미대를 나왔기에 신성희의 친구들이 다 반가웠다. 그 반가움에 기대어 미술인 친구들은 염치불구하고 신세를 졌다. 정찬승·홍민표·이묘춘·심문섭·김한 등을 그 명단에 넣을 수 있다. 신성희의 집은 파리 속의 서울이었다. 숙식과 술에 체력회복까지 다 해결했다. 이국땅이라고 주눅 들거나 고분고분 지낼 청춘들이 아니었다. 요절복통의 기행이 끊이지 않았다.

와인가게 주인 사로잡은 신성희 비법은 …

파리 베르사유 궁전 근처 트라프 작업실에서의 신성희. [사진 정이녹]

파리 베르사유 궁전 근처 트라프 작업실에서의 신성희. [사진 정이녹]

술을 마시다 술이 떨어졌다. 와인을 사러 갔다. 가게 주인은 영업종료시간을 엄수하며 술을 안 팔려고 했다. 단호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거구의 김한은 와인가게 주인에게 프랑스 동전을 엄지와 검지만으로 짜부라뜨리는 무시무시한 괴력과, 혈을 누르며 간단하게 상대방을 제압하는 몇 가지 기술을 보여 주었다. 브라보!!! 찬사가 쏟아졌다. 동양의 무술에 감동한 와인가게 주인은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문만 두드리면 와인을 팔겠다고 약속했다.

함께 간 신성희는 김한이 자신의 태권도 제자라고 속였다. 불어로 슬쩍 말했기에 김한은 그 말을 뻔히 듣고도 무슨 말인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김한보다 10년 연하의 신성희는 한순간에 무림의 어마어마한 고수로 등극했다. 와인가게 주인의 존경심과 경외심의 눈길이 신성희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김한은 서울로 돌아가야 할 사람. 무림의 고수 신성희는 심야 아무 때고 와인가게 주인을 깨워 와인을 살 수 있는 특전을 두고두고 누렸다.

1985년에는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전 근처의 트라프로 거처를 옮겼다. 4층 아파트였는데 동마다 4층 가운데 호실 하나만 5층이 더해진 복층이었다. 아래 위층이 연결된 복층 호실은 정책적으로 아티스트에게 제공됐다. 몽파르나스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기에 파리 시내에 살 때처럼 손님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여기도 여전히 서울과 도쿄, 뉴욕에서 온 미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유준상, 오광수, 이우환 부부, 한용진, 문미애 부부,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 등이 와서 와인에 식사를 하고 갔다.

베르사유 궁전의 숲에는 버섯, 밤, 고사리가 많았다. 프랑스인이 먹지 않는 고사리는 아무런 경쟁도 없이, 프랑스인이 먹는 버섯과 밤은 그들과 경쟁해 가며 채취했다. 가족의 소풍을 겸한 채집경제활동이었다. 식용버섯인지 독버섯인지를 분간하는 일쯤은 신성희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어릴 때 고향 안산 수리산에서 고사리와 나물을 뜯던 그가 아니던가.

파리 신성희 집은 사랑방 역할을 했다. 왼쪽부터 심문섭 부인, 이우환 부부, 심문섭, 신성희, 깜봉 김상란 부부, 정이녹. [사진 정이녹]

파리 신성희 집은 사랑방 역할을 했다. 왼쪽부터 심문섭 부인, 이우환 부부, 심문섭, 신성희, 깜봉 김상란 부부, 정이녹. [사진 정이녹]

정이녹이 잘하는 요리로 양 넓적다리구이가 있었다. 양의 넓적다리에 칼집을 내어 그 사이로 통마늘과 통후추를 넣은 다음 올리브유를 바르고 굽는다. 적당히 구워지면 그 위에 양념을 거듭 더해 가며 구워내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양고기를 먹어 본 한국인이 별로 없었기에 이 요리는 각별한 인상을 주었다.

와인이 이미 나와 안주를 기다리고 있다. 와인의 감식력에 관한 한 신성희는 웬만한 소믈리에 이상이었다. 보통사람들보다 뇌가 혀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있는 듯했다. 일상사의 많은 기억이 와인이 스쳐 간 미각세포의 통로를 따라 함께 떠오르는 희한한 능력이 있었다. 와인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트라프의 복층 아파트 위층 작업실은 다락방처럼 생겼다. 거기서 양고기에 와인을 마시며 파리 속의 이방인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신성희는 연극반 출신답게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 풀어나갔다. 호기심이 많아서인지 주제가 다양했다. 아래층에서는 부인 정이녹이 연신 요리를 해선 계단 위로 올린다. 형철과 혜리는 자지 않고 음식을 나르거나 신기한 듯 한국에서 온 어른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파리로 떠나기 전 신성희는 마대그림으로 유명했다. 마대라는 실재의 텍스츄어 위에 텍스트로서의 환영의 그림이 얹혔다. 환영과 실재, 텍스트와 텍스츄어, 이 둘이 빚어내는 긴장감이 작업의 주제였다. 파리에 간 이후로 그는 마대를 천 조각이나 실의 상태로 해체하여 결국은 누아주(묶기)라는 양식을 완성하였다. 평면이 입체로 돋아났다가 필경에는 평면과 입체가 통합되는 새로운 조형양식이었다.

새로운 미술을 들고서 서울을 찾아와 갤러리현대에서 전시했다. 전시가 있거나 아이들의 여름방학을 틈타서 서울을 찾으면 파리에서 적어 온 음식이름대로 차례차례 식당을 탐방했다. 우래옥과 평양면옥의 물냉면과 만두, 오장동의 회냉면, 명동칼국수는 빠지지 않았다.

신성희의 고향은 경기도 안산이다. 안산에서 버스를 타고 장을 보러 서울에 오신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종로4가 시계방골목의 곰보냉면집에서 함흥냉면을 먹었다. 어린 날의 좋았던 기억 때문인지 신성희는 냉면이 좋았다. 인생의 후반기에는 명동의 차이나타운 골목을 자주 찾았다. 개화에서 물만두, 짜장면, 잡채밥에 배갈을 마셨다. 밥이 곧 안주인 식습관이었기에 중국집은 그만이었다.

마대를 실로 해체해 ‘묶기’인 누아주 완성

신성희 하면 저마다 와인감식의 역량을 자랑하는 미술계에서도 명인으로 통했다. 와인의 향유에는 아무래도 돈이 많이 투자된다. 화가의 수입으로는 값비싼 고급와인으로만 일관하기가 버겁다. 부인 정이녹은 남편에게 30대는 30프랑, 40대는 40프랑, 50대는 50프랑으로 와인가격의 상한선을 선언했다. 50프랑이면 5만원쯤 된다. 신성희는 무리를 해서라도 몇 배나 비싼 와인이 마시고 싶었다. 욕망과 경제력 사이에 절충이 필요했다. 신성희는 이를 가성비 우위로 돌파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인에 대해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가족을 동반하여 와인을 사러 부르고뉴 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미식의 소질에 더해진 공부는 보람을 가져왔다.

신성희를 따라다니면 낮은 가격으로도 맛이 깊고 풍부한 와인을 음미할 수가 있었다. 신성희는 테라(terra)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테라는 와인을 만들게 한 땅의 기질을 뜻한다. 와인은 테라의 결정체다. 한 모금의 와인에서 태양의 뜨거운 기운 사이로 테라의 바람과 구름과 비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좋은 음식을 먹어야 좋은 생각이 나고, 좋은 생각이 나야 좋은 작품을 할 수가 있다.” 신성희의 지론이었다. 좋은 테라에서 좋은 와인이 나오듯, 작품의 생산자인 자신을 좋은 테라로 가꾸고 싶은 바람을 그리 말했다.

작업의 경지가 절정에 올랐을 때 신성희는 세상을 마감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카베르네 소비뇽처럼 텁텁하고 무던한 모습의 화가 신성희였다. 좀 더 오래 살아 더욱 숙성된 경지의 신성희를 볼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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