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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류현진에게 열광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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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팀장

정제원 스포츠팀장

그는 당당했다. 침착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LA다저스의 선발투수 류현진. 메이저리그 개막전에 나와 빛나는 호투를 펼친 끝에 승리투수가 됐다. 많은 국민이 아침잠을 설쳐가며 이 장면을 지켜봤다. 요즘 반갑고, 기쁜 뉴스는 메이저리그의 류현진과 국가대표 공격수 손흥민의 승리 소식 뿐이다.

우리는 왜 류현진과 손흥민에 열광하는가. 숱한 부상을 딛고 피나는 노력 끝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성공 스토리가 주는 울림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두 선수는 척박한 환경에서 월드클래스의 실력을 키워 세계 무대에서 성공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류현진과 손흥민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지도 모르겠다.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조바심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체구가 큰 서양 선수를 꺾는 데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가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다. 외국인을 한국에 초청해 경복궁에도 가보게 하고, 민속촌에도 가보게 하면서 그들이 겪는 경험과 해프닝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갈비나 된장찌개 같은 한국 음식을 들면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처음엔 낯선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겪는 해프닝이 우습기도 하고, 신기해 보였다. 특히 그들이 매운 한국음식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국뽕(국수주의)’이 심해진다. 제작진은 핀란드나 독일·폴란드 사람들을 한국의 산에 오르게 하고, 갈비를 뜯게 하면서 ‘아름다운 금수강산’ ‘맛있는 한국음식’을 외치게 한다. 이들이 매운 한국 음식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 데도 ‘음식이 맛있어서 어쩔 줄 모른다’는 식의 자막을 단다. 동남아시아보다는 피부가 흰 서양의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쩔쩔매는 장면이 주류를 이룬다. (최근에서야 태국 편이 방송 중이다.) 류현진의 승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과 외국 손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건 비슷한 심리 아닌가.

대한민국은 언제부터인가 ‘월드클래스’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국의 메이저리그와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를 즐겨 본다. 빅리그 스타들의 이름을 줄줄이 꿴다. 반면 세계 정상급과는 거리가 있는 국내 프로축구(K리그)엔 큰 관심이 없다. 프로골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팬들은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투어에 열광한다. 골프채널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건 LPGA 중계다. 한국의 박성현이 미국의 렉시 톰슨과 샷 대결을 펼치면 시청률이 평소의 10배 가까이 올라간다. 월드클래스가 아니면 통하지 않는 현상은 대중문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10대들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방탄소년단(BTS)의 세련된 편곡과 칼 군무에 열광한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등 공산품도 월드클래스를 찾는다.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대한민국의 콤플렉스를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단기간 내에 압축성장을 일궈낸 결과를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 아닐까. 그게 항상 나쁜 건 아니었다. 월드클래스 강박증 덕분에 세계 최고의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갖게 됐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이상 국뽕은 곤란하다. 청국장이 구수하다고 외국인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 서양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안달하는 건 이제 그만 하자. 흰 피부의 외국인에겐 한없이 관대하다가도, 검은 피부의 이방인에겐 가혹할 정도로 야멸찬 모습을 보이는 이중적인 태도도 문제다. 류현진과 손흥민처럼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됐다.

정제원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