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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감히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지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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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논설주간

최훈 논설주간

집권 2주년이 다가오는 현 정권의 ‘교서(敎書)’를 조선 시대라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다. 一 곤궁한 이를 긍휼히 여긴 소득주도 성장을 의구(疑懼)치 말지어니. 二 백성의 생명, 안녕을 궁구(窮究)한 탈원전도 마찬가지리라. 三 친일파와 왜구의 근거인 일본은 끝까지 배척하라. 四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을 굳이 국조(國祖)로 숭모해선 곤란할지어다. 五 북조선은 동복(同腹)의 피붙이니 폄훼와 경계 대신 예를 갖춰 수호(修好)하라.

대일·대북·경제 등 국정 전반이 #조선조 교서처럼 불변의 경직성 #반일 선동 마치 ‘기해환국’ 방불 #진보만의 우상 과감한 탈피 기대

六 보수는 별의별 보수든 개과천선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니 소통을 금하며 그 이단(異端)에 현혹됨을 저어하라. 七 그러니 전대(前代) 이명박, 폐위(廢位) 박근혜의 누업(累業)과 적폐는 뭐든 청산하라. 八 시장과 자본, 상인들은 본시 간사(奸邪)하며 무도(無道)하니 늘 총람하고 규율하라.

九 탕평(蕩平)을 금하며 숱한 척사(斥邪)의 투쟁 속에 이어 온 우리 조정의 순정(純正)한 혈통을 이십년 집권으로 보전하라. 十 참고 기다리면 광정(匡正)된 낙원이 도래할 터인즉 감히 이외 다른 우상(偶像)을 섬겨선 안 될 지어다….

지금껏 교서는 신료(臣僚)들로부터 충직스럽게 받들어지고 있다. 진보 사림의 중진 송영길이 탈원전에 어깃장을 놓는 ‘상소(上疏)’를 한 차례 올렸다 혼쭐이 나거나, 호조(戶曹)의 종오품(從五品) 신재민, 사헌부(司憲府) 종육품 김태우의 직간(直諫) 사건으로 분란을 치른 걸 빼고는….

드루킹 사건으로 역경에 처한 집권 붕당(朋黨)의 영수 이해찬은 “탄핵당한 세력이 감히 촛불혁명으로 당선된 대통령을 대선 불복으로 대한다는 말이냐”며 자유한국당을 준열히 꾸짖기도 했다. 조선의 언어로 번안해 보면 “민초들 반란으로 폐위된 임금의 음사(陰邪)한 폐족 무리들이 감히 반정(反正)의 역모를 꿈꾸고 있다는 게냐” 정도 될 터이다. “우리 개혁이 뿌리내리려면 20년 집권 계획을 지녀야 한다”고 그는 집권 사대부들의 야망을 호령하고 나섰다.

석연찮게 봉합됐던 전대의 장자연·김학의 사건은 최근 어명(御命)에 의해 조직의 명운을 건 의금부·형조,포도청의 서슬 퍼렇게 벼린 칼날을 맞게 됐다. 적폐 청산이야말로 영속의 교지라는 증표다. “재벌 체제는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는 공정위원장의 연설 원고는 진보 사대부들의 오랜 앙금이 불변함을 드러낸다.

급기야 진보 사림들은 경천동지할 ‘기해환국(己亥換局)’을 예고했다. ‘역사의 재소환(再召喚)’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의 기해년 3·1절 기념사가 신호탄이었다.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 오래 미뤄 둔 숙제”라며 “역사와 정의 바로세우기가 국가의 의무”라는 서릿발 같은 훈유(訓諭)였다. 부복(俯伏)을 마친 팔도의 진보 사림들은 총궐기하고 있다. 경기도의회의 진보 사림들은 일본 전범기업 제품에 딱지를 붙이기로 했다. 그래도 친일파 후손들에게 나치 시대 유대인들이 달던 ‘다윗의 노란 별’ 비슷한 걸 부착한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들리지 않고 있다. 전국 학교의 이른바 ‘친일파 교가’들도 폐출되고 있다. 보수 사림 좌장인 나경원에겐 “토착 왜구(土倭:얼굴은 한국인, 창자는 왜인인 도깨비 같은 자)”라는 성토가 쏟아졌다. ‘친일파=보수=재벌’이 척사의 과녁인 분위기다. 심지어 125년 전 동학운동의 피해 보상까지 도모된다. 거센 급류는 반대 여론을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조선의 국기를 문란하게 만든 도적)의 대상으로 몰아버릴 기세다.

환국의 확산에 경종을 울린 건 진보 사림의 거두이자 대학자인 최장집의 일인소(一人疏)였다. “역사를 굉장히 좁은 각도로 해석하는 건 사려깊지 못한 발상이며 정부가 일제 청산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건 위선”이라는 일갈이었다. “가능하지도 않은 걸 옳다 말하고 행동하는 건 정치적 목적의 기획이자 이념 대립을 부추기려는 관제 민족주의”라는 그의 통탄은 큰 여운을 남겼다.

조선의 조정발(發) ‘역사 재공정’은 최악의 누란을 불렀다.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援軍)한 은공과 사대를 둘러싼 명·청 교체기의 재조지은(再造之恩) 논쟁, 군왕 생모의 죽임을 둘러싼 역사 재소환 등은 숱한 사화와 부관참시(剖棺斬屍)로 나라를 수렁에 빠트렸다. 가정(假定)은 가능하나 결코 검증(檢證)은 할 수 없는 대상이 역사다. 살아 있는 정권의 역사 재단(裁斷)은 ‘보복의 악순환’만 초래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A.D. 2019년의 개명된 세상 아닌가. 오히려 당쟁과 과거사·예송(禮訟) 논쟁으로 허송하던 조선이 일본에 잡아먹힌 냉혹한 현실을 더욱 성찰해 일본을 앞질러 가길 궁리할 때다. 집권 2주년엔 과거보다 미래로 향한 이런 류의 새 교서가 반포(頒布)되길 부질없이 상소해 본다. “향후 과인(寡人)은 국정을 탕탕평평(蕩蕩平平)의 마음으로 대할 터이니, 경(卿)들도 무편무당(無偏無黨) 자세로 임하라. 기왕의 교서에 집착됨 없이 안팎 정책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유연함으로 접근해 달라. 참 요즘 외방(外邦) 신문물의 우상이라는 AI·블록체인·빅데이터 등까지 적극 수용해 부국융성을 도모할 지어다….”

최훈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