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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사회적 대타협, ‘결사의 예술’인가 ‘파벌의 해악’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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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결사의 예술인가 파벌의 해악인가. 이익집단 정치를 바라보는 두 상반된 시각이다.  ‘결사의 예술’은 프랑스 정치이론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1831년 미국을 방문한 후 그 감상을 기록한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표현이다. “프랑스에서는 정부를 들먹거리고 영국에서는 영주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데 반해, 미국에서는 결사체를 조직한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에서 인민들은 공동의 요구를 달성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최고로 완벽한 예술의 경지에서 추구하고 있다.” 반면 미국 건국 초기 제임스 메디슨은 미 연방헌법의 기초가 된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에서 ‘파벌의 해악’을 경고한 바 있다. “인간은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협력하기보다 서로를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강력한 파벌의 횡포를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회적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유용 #대화기구의 대표성, 포괄성 확보와 #운용의 묘를 살리는 정치력이 관건 #결사의 예술로 승화시켜주길 기대

현 한국 상황을 돌아 보면, 일견 사회적 대타협의 이름으로 이익집단 간 첨예한 갈등을 대화와 합의를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모습에 ‘결사의 예술’을 조심스럽게 기대하게 한다. 현 정부 들어 새롭게 구성된 노사정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문제에 대한 합의의 정치를 시도하고,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택시업계와 카카오모빌리티가 참여한 사회적 대타협기구는 진통 끝에 출퇴근 카풀 허용이라는 합의안을 도출해 내기도 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처럼 지역의 다양한 노사민정 주체들의 대화와 양보에 힘입어 광주시-현대자동차 합작 투자협약에 이른 사례도 있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여러 분파 간 복잡한 셈법과 갈등 속에서 ‘파벌의 해악’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경사노위의 탄력근로제 합의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아예 시작부터 반발하며 빠졌고, 최종 합의를 위한 전체회의는 여성·청년·비정규직 계층 대표의 불참으로 두 차례나 무산됐었다. 카풀 합의에도 카카오모빌리티를 제외한 다른 모빌리티 업체의 반발과 택시업계 일부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상생 모델로 얘기하지만,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국민 세금으로 낮은 임금을 보전하려 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결사의 예술’과 ‘파벌의 해악’이 중첩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익집단 정치라는 게 본래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는 터이니, 관건은 그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은 극대화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먼저 사회적 대타협은 유용한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 대타협이 시장의 자연스러운 생태계를 교란하고 국회의 정당한 입법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적 대화 무용론을 펼치기도 한다. 이는 편향된 시각이다. 사회적 대타협은 시장의 원리와 국회의 권한을 훼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장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도 놓칠 수 없고, 정치권의 대의제 정치뿐 아니라 사회적 대화와 합의의 정치도 유효하다면 활용해야 한다.

둘째, 제도의 문제다. 현 사회적 대타협의 실험이 삐걱거리는 건 사회적 대화 기구의 대표성 문제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해당사자들이 자신의 대표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합의 제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사 주요 단체끼리 좌지우지하는 경사노위에 계층 대표들이 반발하고, 카풀 합의 과정에 초대받지 못한 모빌리티 업체들이 반대하는 이유다. 반면, 상대적으로 22개에 이르는 광범위한 노사민정 단체들을 아우른 ‘광주형 일자리’의 경우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은 협의체의 대표성과 포괄성이 중요한 제도적 요인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셋째, 운용의 묘를 살리는 정치력이 중요하다. 경사노위의 탄력근로제 합의가 파행에 이른 또 하나의 이유로 정부·여당이 사회적 대타협을 형식적인 통과의례 정도로, 도구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무리한 내용의 합의 사안을 몇 달도 안 되는 단기간에 충분한 토의 없이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식으로 밀어붙이다 낭패를 보았다는 지적이다. 주요 단체 위주로 경사노위를 운용하는 와중에 심지어 계층 대표들을 “사회적 대화의 보조 축”이라 부르는 정치적 우를 범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대조적으로 ‘광주형 일자리’는 2014년부터 시작되어 비교적 장기간 타협의 정치가 이루어진 경우다. 카풀 합의 관련 “감내하기 힘든 욕을 먹어가며 150여 차례 택시 농성장을 찾아가니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라는 한 국회의원의 고백도 정치적 설득과 중재의 끈질긴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사회적 대타협의 정치에 왕도는 없다. 유럽과 달리 노사정 간 신뢰와 합의적 정당정치의 유산이 없는 우리의 경우, 합의의 판을 짜고 설득과 압박의 전략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긴 호흡으로 타협을 이끄는 정치력이 특히 요구된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 하지 않던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게 정치다. ‘파벌의 해악’을 ‘결사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사회적 대타협의 정치를 다시금 기대해본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