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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트럼프의 ‘벼랑 끝 전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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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비핵화 협상을 깰 수 있다는 북한 측 발표는 진심일까, 엄포일까. 과정을 보면 ‘벼랑 끝 전술’을 염두에 둔, 틀림없는 ‘블러핑(과장)’이다. 국내엔 안 알려졌지만 이번 발표는 하노이 정상회담 결과를 전해 달라는 루마니아 대사관 요청에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응한 구도로 돼 있다. 여기에 각국 대사와 외국 특파원들이 초청됐는데 통제가 심했다. 오로지 대사들만 질문할 수 있었다. 협상 중단 카드를 스스로 밝힌 건 아니라는 모양새 속에 원하는 이야기만 나오도록 꾸며진 이벤트였던 셈이다. 북한 매체들의 이례적 반응도 블러핑설을 뒷받침했다. 평소라면 발표 즉시 다투어 선전했을 텐데 이번엔 모두 침묵했다. 북한이 협상에 나서도 내부적으로 얼굴 깎이는 일 없게 신경을 쓴 모양이다.

이렇듯 북·미 간 기 싸움이 치열한데도 우리 정부는 대화의 불씨는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양쪽에 협상 의지가 있다는 논리다. 외견상 맞을지 모르나 싸늘한 분위기로 평화적 비핵화는 한결 힘들어졌다. 우선 알맹이 있는 협상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게 큰 문제다. 스티브 비건 미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지난 11일 기본 개념조차 합의되지 않은 현 상황을 개탄했다. 비건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고 하는 데 적용 대상이 뭔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영변에는 플루토늄 생산 및 우라늄 농축 시설을 비롯한 390여개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그러니 어디까지 영변으로 볼지 정하지 않고선 협상이 될 턱이 없다.

게다가 미국 측 태도도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다. 북한 측 요구인 단계적 비핵화에 긍정적이던 비건마저 달라졌다. 그는 지난 11일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야 제재를 풀 수 있다는 공감대가 미 정부 내에 형성됐다”고 밝혔다. ‘선 비핵화 후 제재해제’라는 강경 모드로 돈 것이다.

더 중요한 건 비핵화 시한마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를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 전 백악관 고위관계자는 “이번 트럼프 임기 중 비핵화를 이루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임기가 끝나는 2021년 초가 시한인 셈이다.

이처럼 미국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는 터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벼랑 끝 전술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은 짙다. 하지만 이게 통하려면 두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먼저 북한이 핵전쟁을 불사할 수 있다는 인식을 상대가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제 김정은은 북한의 궤멸도 불사할 미치광이로 보이지 않는다. 둘째, 전쟁 발발 시 양쪽 모두 전멸할 게 확실해야 벼랑 끝 전술이 먹힌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강한 쪽에서 무력 충돌을 피하지 않겠다고 하면 감당이 안 된다. 냉전 때 미·소가 핵무기 수천발씩 보유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북한에 핵폭탄 수십발이 있다 한들 미국과 정면으로 붙는 건 자살행위다.

이런 이유로 벼랑 끝 전술을 잘 써먹은 건 김정은이 아닌 트럼프였다. 지난해 그는 싱가포르 정상회담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을 전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꼬리를 내리고 무마에 나선 건 북한이었다. 이런 전례에 비추어 앞으로 벼랑 끝 전술을 잘 써먹을 인물은 트럼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터라 우리 정부가 섣불리 끼어들었다 판을 망쳐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기세에 눌린 김정은이 대폭 양보하기로 마음을 굳히려는 참에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 운운하면 그의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 북핵 해결의 촉진자는 못될망정 훼방꾼이 돼선 안 된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