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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올레길에 사람 드문드문, 관광객 다 어디 갔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21)

가끔 내 마음을 잡아끄는 피사체를 만날 때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고맙다. 저 나무,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사진 박헌정]

가끔 내 마음을 잡아끄는 피사체를 만날 때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고맙다. 저 나무,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사진 박헌정]

오랜만에 아내와 올레길을 걸었다. 조천의 북촌리부터 벌러진동산을 통과해 구좌읍 김녕까지 6km 정도다. 어제까지도 미세먼지가 자욱했다. 밝은 햇살과 따뜻한 바람이 생각나는 3월의 제주, 그래서 짙은 미세먼지는 더 당황스러웠다. 간밤에 약간의 비를 뿌린 후 오늘은 거짓말처럼 맑다. 아니, 어제의 뿌옇던 제주가 거짓말 같다.

올레길은 참 투박하다. 돈 들인 흔적이 별로 없다. 길 안내를 위해 곳곳에 묶여있는 리본, 돌담에 칠해진 화살표, 가끔 보이는 간새가 시설의 대부분이다. 제주 올레는 지역민과 자원봉사자, 후원회원들이 힘 모아 꾸려가는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시멘트 들이부어 예쁘게 꾸며놓은 게 아니라 밭길-마을길-해안길(해변)-오름-찻길처럼 있던 길을 있는 그대로 이어 만든 길이라 제주의 자연과 생활과 사람을 다 만날 수 있다.

누군가의 삶을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그리 쉽고 가벼운 일이 아니다. 어느 해 태풍이 지나간 후. [사진 박헌정]

누군가의 삶을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그리 쉽고 가벼운 일이 아니다. 어느 해 태풍이 지나간 후. [사진 박헌정]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뻥뻥 뚫린 가슴의 상처를 매만지는 치유의 길, 말 그대로 ‘놀멍 쉬멍 걸으멍 고치(함께) 가는 길’이다. 나 역시 지난 10여년 동안 빡빡한 회사생활과 도시생활에서 얻어터지고 삐질 때마다 찾아와 걸으며 위로받곤 했다. 하루 이틀 걷고, 바닷가에서 소주를 마시면 그래도 얼마간 다시 욕 먹고도 버티며 살 힘이 생겼다.

볼 것 많고 할 것도 많은 제주도다. 눈 돌리는 곳마다 돈 들어갈 일뿐이라며 불만인 관광객도 많다. 처음 몇 번은 들뜬 마음으로 가족들과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섬의 이곳저곳으로 렌터카 몰고 뛰어다녔다.

차에서 내려 두 다리로 걷는 순간부터 제주의 본래 모습이 내게 다가온다. [사진 박헌정]

차에서 내려 두 다리로 걷는 순간부터 제주의 본래 모습이 내게 다가온다. [사진 박헌정]

언제부턴가 느낌의 감도가 떨어져 갔다. 뭔가 기억에 남을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즈음, 비로소 바다 빛깔과 한라산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려 아스팔트 포장도로 바깥의 투박한 흙길로 들어가 볼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 바퀴의 속도에서 걸음의 속도로 바뀌면서 비로소 ‘휴식’이라는 말이 다가왔다.

제주도의 ‘휴식’ 개념에는 올레와 오름을 빼놓을 수 없다. 느지막이 일어나 나른하게 빈둥대며 현지인의 일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게 올레 걷기의 시작이었다. 감귤밭, 서서 풀 뜯는 말들, 새 소리, 해안도로의 맑은 하늘과 맵지 않은 바람… 신기한 제주의 일상에 빨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올레길을 다 돌았다. 올 때마다 한 구간씩 띄엄띄엄 걸은 기록을 모아보니 제주도 한 바퀴는 물론이고 어느 구간은 서너 번씩 걸었다. 처음에는 올레길에서의 과장된 감동을 블로그에 열심히 써댔다. 찍은 사진도 수천장이다. 언젠가부터 흐지부지되었다. 출근길, 점심 식단 같은 일상을 매일 기록하지 않는 것처럼 올레가 생활 속에 들어오니 할 말도 쓸 말도 없었다.

올레를 걷다가 동네 강아지들과 정들면 곤란하다. 이 녀석들은 30분 동안 꼬리 치며 나를 따라왔다. [사진 박헌정]

올레를 걷다가 동네 강아지들과 정들면 곤란하다. 이 녀석들은 30분 동안 꼬리 치며 나를 따라왔다. [사진 박헌정]

천천히 걷다가 사람 만나면 인사하고, 귤도 얻어먹고, 친해진 강아지가 따라오면 쫓아 보내고, 햇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막걸리를 반주로 편의점 도시락 까먹고, 해안에서 해녀가 따온 해산물에 소주잔 비우고… 길동무가 있어도 좋고 혼자여도 좋았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경직되었던 표정이 많이 풀렸나 보다. 같은 인사를 해도 예전보다 주민들이 반갑게 맞고 이야기 시간이 는다.

가끔은 표식이 없어 왔다 갔다 헤매거나 있는 표식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들어갔다 되돌아 나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맥 풀리고 부아도 났지만 코스대로 걷든 이탈하든 별 상관도 없다. 올레라 이름 붙인 길과 이름 없는 길이 무슨 차이 있을까. 가끔 “네 시간 지났는데 겨우 10㎞ 왔어. 더 빨리 걷자!” 하는 사람도 본다. 서울살이를 그대로 옮겨온 모습이지만, 곧 달라질 것이다.

올레길 리본은 참 예쁘다. 어제는 바람에 팔락이며 나부끼는 파란색과 감귤 색 리본을 보다가 문득 살면서 길을 헷갈릴 때마다 저런 표식이 나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기로!” 하듯 살짝 굽어진 화살표도 예쁘다. 까만 흙에 점점이 박힌 주황색 당근도 예쁘고, 푸들푸들 거리며 낯선 이를 경계하는 말들의 착한 눈빛도 예쁘고, 비에 젖은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박힌 빨간 동백꽃도 예쁘다.

올레길에 나부끼는 파란 리본은 참 예쁘다. 삶의 길이 헷갈릴 때마다 저렇게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사진 박헌정]

올레길에 나부끼는 파란 리본은 참 예쁘다. 삶의 길이 헷갈릴 때마다 저렇게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사진 박헌정]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좋은 올레길에 사람이 별로 없다. 보통 15~20㎞에 이르는 한 코스를 종일 걸어봐야 두어 사람 만날 뿐이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서 그런가 싶어 역방향으로 걸어봐도 똑같다.

통신사 브랜드명일 정도면 사람들이 모를 리 없고, 저가항공 덕분에 제주가 훨씬 가까워졌는데도 그렇다. 당장 내 주변을 통틀어 올레를 걸어봤다는 사람은 열 명 이내다. 올레 관계자에게 하루평균 이용자 수를 물어봤지만 수시로 들락거리는 길이라 셀 수 없다고 한다.

서울광장 집회참가자가 주최 측 추산 3만 명이고 경찰 추산 2000명이라고 할 때의 카운트 방식을 생각해본다면 어림잡아 계산해도 따질 사람 없을 텐데, 올레 관계자들 역시 올레길처럼 순박하고 꾸밈없는 것 같다.

제주공항에는 늘 사람이 북적인다. 등산복 차림도 많다. 그런데 한라산에도 올레길에도 사람이 별로 없다. 대체 어디가 더 좋길래, 이 좋은 곳을 놔두고 다들 어디가 있는 걸까. 제주도 이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만 알던 맛집이 유명해져 북적거리면 비밀장소를 뺏긴 것처럼 심통 나겠지만 올레길은 최대한 나누고 싶다. 혼자 누리기 아쉽고 미안하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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