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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지 여행하고 反이민 돌아선 ‘외로운 늑대’ 소행인 듯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뉴질랜드에서 50명의 희생자를 낸 이슬람 사원(모스크) 무차별 총격 테러가 반이민·반이슬람주의에 휩싸인 ‘외로운 늑대’(lone-wolf·전문 테러조직이 아닌 자생적 테러리스트)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뉴질랜드 모스크 테러 사망자 50명으로 늘어

17일(현지시간) CNN 등에 따르면 호주 국적의 테러범 브렌턴 태런트(28)는 15일 범행 전 인터넷에 올린 70여쪽의 매니페스토(선언문)에서 반이민주의, 무슬림 혐오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민자, 특히 무슬림들을 ‘침략자’라고 표현하고, 그들에 대한 ‘복수’라는 용어를 여러 번 쓰면서다. 그는 이런 선언문을 뉴질랜드 총리에게도 보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범행 9분 전 테러범으로부터 메일로 선언문을 받은 30여명 중 한 명이었다”며 “극단적인 견해에서 나온 이념적 선언문이 이번 총기 테러와 연관돼 있다는 건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15일 벌어진 이슬람 사원(모스크) 무차별 총격 테러로 인한 부상자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15일 벌어진 이슬람 사원(모스크) 무차별 총격 테러로 인한 부상자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아던 총리는 또 수사 과정에서 수집된 증거들을 분석한 결과 한 사람만 구금된 것이라며 “다른 총격범은 없었다“고 말했다. 현지 경찰청장도 태런트의 단독범행이라고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현 시점에서 이번 테러 공격과 관련해 단 한 사람만 기소됐다”고 밝혔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사건이 테러 단체의 조직적인 공격이 아닌 ‘외로운 늑대’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이민자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뉴질랜드는 인구 중 약 20%가 아시아와 중동, 남태평양 출신이다. 태런트는 뉴질랜드처럼 남반구 극단에 해당하는 지역조차 대규모 이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보이기 위해 범행 장소로 삼았다고 선언문에 적었다. 이민자에 대한 증오도 쏟아냈다. 프랑스 동부의 한 마을을 “저주받은 곳”이라고 쓰며 “모든 프랑스 도시와 마을엔 침략자들이 있다”고도 했다. 이들을 위협하고 물리적으로 제거해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주 비율을 직접 낮추겠다고도 썼다.

외신들은 그가 범죄 기록이 없고 정보기관 등의 감시대상자도 아니었다며 2011년부터 7년간 북한을 포함해 해외 각지를 여행한 뒤로 성향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파키스탄과 터키뿐 아니라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폭력적인 극단주의 이념에 물들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그는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를 광범위하게 여행했다”고 썼다. 그가 2009~2011년 트레이너로 일했던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주 그래프턴 피트니스클럽 매니저 트레이시 그레이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해외를 여행하는 동안 뭔가 달라졌다”고 증언했다.

WSJ 등에 따르면 그가 범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건 2017년 4~5월경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전역을 여행할 즈음으로 추정된다. WSJ은 “당시 유럽은 시리아 등 분쟁지역에서 탈출한 난민이 대거 유입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던 시기”라고 전했다. 특히 이 시기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벌어진 반이민 트럭 테러와 프랑스 대선에서 반이민을 내세운 극우정당의 패배 등 사건에 그는 분노를 드러냈다고 한다. WSJ는 “호주와 뉴질랜드 등 무슬림과 다른 이민자들이 밀려든 국가들에 대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썼다.

뉴질랜드 총격 테러범 브렌턴 태런트(28)로 추정되는 인물.[AFP=연합뉴스]

뉴질랜드 총격 테러범 브렌턴 태런트(28)로 추정되는 인물.[AFP=연합뉴스]

여행지엔 북한도 포함돼 있었는데 호주 ABC방송은 태런트 등 단체 관광객들이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있는 북한 양강도 삼지연 대기념비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태런트는 스스로 2011년 노르웨이에서 77명의 사망자를 낸 반이슬람주의 극우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에 가장 큰 영감을 받았다고 쓰기도 했다. 브레이비크 역시 범행 전 15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선언문을 인터넷에 올렸었다.

유럽과 미국을 주 무대로 했던 반이민ㆍ반이슬람 테러가 비교적 테러청정국이라 불린 뉴질랜드에 상륙하며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15일 “서방을 비롯한 전 세계는 이슬람 혐오증에 대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인우월주의와 관련 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아주 심각한 문제를 가진 소수의 사람이 벌인 일”이라고 말했다. 태런트는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며 CNN 등은 그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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