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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 따뜻한 마당, 점령군 잡초와 싸우려니 머리가 ‘지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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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호 28면

단독주택에 살아보니 

사과로 새먹이를 만들어 ‘까치밥’을 감나무에 달아 놨지만 아직 새소리는 뜸하다. [사진 김동률]

사과로 새먹이를 만들어 ‘까치밥’을 감나무에 달아 놨지만 아직 새소리는 뜸하다. [사진 김동률]

단독살이에게 3월은 긴장감을 안긴다. 활시위가 서서히 당겨지는 느낌이다. 3월은 소리로 다가온다. 아파트에서는 듣지 못하는 소리다. 침묵에서 움트는 소리, 햇살처럼 번지는 생명의 소리, 망각의 대지에 기억을 소생케 하는 소리다. 그러나 3월을 두고 만물이 소생하는 빛나는 계절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로맨틱하다. 자연에 있어 3월은 만물이 생존경쟁에 돌입하는 계절쯤 된다.

무자비한 잡초 번식력에 적의감 #마당 있는 집에 살려면 통과의례 #밤 사이 누군가 차고 앞에 주차 #이른 새벽 외출 길 ‘미치고 폴딱’ #이런 어려움에도 인생 최고 선택 #‘어머니 자연’ 위대함 느끼게 해줘

간만에 마당을 살피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잡초다. 구석구석, 모진 겨울을 견뎌낸 잡초가 파릇파릇하다. 화초는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데 잡초는 줄기차게 뻗어 있다. 나훈아 선생에게는 미안하지만 잡초 땜에 살 수가 없다. 노랫말처럼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잡초가 아니다. 손도 있고 발도 있다. 이 구석 저 구석 옮겨 다니며 뿌리를 내린다. 잡초를 두고 ‘약효가 검증되지 못한 약초’라며 옹호하는 사람도 있다. 잡초 비빔밥까지 판매되는 세상, 한때는 잡초와 친해지려고 노력해 봤다. 그러나 마당을 무자비하게 잠식해 가는 잡초를 바라보니 적의감에 주먹까지 불끈해진다. 잡초와 친구 되기, 참으로 어려운 숙제다.

저항의 상징 ‘민들레’ 파내기 마음 불편

모진 겨울을 견뎌낸 잡초가 마당에 파릇파릇하게 피어나고 있다. [사진 김동률]

모진 겨울을 견뎌낸 잡초가 마당에 파릇파릇하게 피어나고 있다. [사진 김동률]

잡초의 대장주는 민들레다. 누구는 민들레꽃을 두고 보기도 예쁘고 쓸모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님 주신 밤에 씨를 뿌리고/사랑의 물로 꽃을 피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편단심 민들레가 끝끝내 마당을 떠나지 않는다”는 데 방점이 있다. 구로공단 어느 공장 앞에서, 광화문에서, 신촌에서,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민들레는 거친 틈에 산다. 심지어 도심 아스팔트 틈에서도 노랗게 비집고 올라온다. 3월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잘 자란다. 억세고 질긴 덕분에 민주화 세대에게는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민들레는 그런 꽃이다. 그래서 맘 편하게 파내지 못한다.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지키려던 선각자들을 그린 영화 ‘말모이’에서도 민들레는 자주 등장한다. 민들레를 가만히 보면 밟아 보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인 ‘민들레처럼’ 이란 노래를 한때 열심히 불렀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중략/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중략/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그 시절 생각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지다가도 뽑을 생각을 하면 갑갑해져 온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려면 춘삼월에 마땅히 치러야 할 통과의례다.

부지런한 잡초와는 달리 새소리는 아직 뜸하다. 늦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지절대던 새들도 이른 봄에는 보기 어렵다. 정원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사과로 새먹이를 만들어 감나무에 달았다. 서양에서는 ‘애플 피더(apple feeder)’ 라고 해서 이른 봄, 과일로 만든 새먹이를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우리로 치면 까치밥인 셈이다. 유학시절 현지인 집에서 본 것을 따라 해 봤지만 토종새라 그런지 쪼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차고 앞에 주차금지 부탁 호소문을 붙였지만 먹히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사진 김동률]

차고 앞에 주차금지 부탁 호소문을 붙였지만 먹히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사진 김동률]

단독살이에게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주차다. 주차문제로 감방까지 간다는 뉴스가 이해 가지 않았는데 단독에 살아보니 실감 난다. 우리 집의 경우 차고가 있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주차장이 있다고 안심하면 큰코다친다. 늦은 밤, 누군가가 주차장 셔터 앞에 주차하는 경우가 있다. 이른 새벽, 길을 나서려 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모두가 잠자는 시간, 전화해 봤자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치고 폴딱 뛴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결국은 발을 동동 구르며 택시를 부르게 된다. 고심 끝에 호소문을 붙였다. 하지만 캄캄한 밤이라 보이지 않았을까, 여전히 주차하는 경우가 있다. 지인들은 호소문을 두고 지나치게 저자세라고 놀려댔지만 그마저도 먹히지 않아 슬픔을 느낀다.

아내에겐 미안 ‘기처가’로 벌벌 떨며 살아

연재 첫 회가 나간 뒤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리 고통스러워하면서 왜 단독에 사느냐고? 소이부답(笑而不答), 이백의 시구가 제격이지만 조금 더 보탠다. 필자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막내이자 386세대의 맏이다. 우리 세대의 경우 대개 시골에서 자라 인근 대도시에서 중·고교를 다닌 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대학시절에는 하숙이나 자취를 했으며 결혼하면서 아파트에 살게 된다. 르 코르뷔지에와 알랭 드 보통은 집을 두고 “영혼을 다독이는 공간”이라고 근사하게 정의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아파트는 재산증식 수단과 욕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강남 요지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단독으로 이사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자 아내에게는 최악의 결과였다. 덕분에 아내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절한다는 ‘기처가’로 벌벌 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당이 있는 집은 당연히 “영혼을 위무하는 공간”이 된다. 인간에게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대 앞에 봄이 왔다. 앵두나무 새순 사이로 여린 봄 햇살이 뭉텅뭉텅 쏟아지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다. 고려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졸업. 매체경영학 박사. KDI 연구위원, 영화진흥위원, EBS 이사, 공기업 경영평가위원 등을 역임했다. 에세이가 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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