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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운명의 주판알 튕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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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하현옥 금융팀 차장

영화 ‘마이 올드 레이디’의 주인공 마티아스. 무일푼의 뉴요커인 그는 소원하게 지내던 아버지가 파리 마레 지구에 있는 근사한 아파트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걸 알게 된다. 집을 팔아 한몫 챙기려 파리로 향한 그에게 뜻밖의 상황이 펼쳐진다.

아버지에게 집을 판 뒤 그곳에 살고 있는 92세의 마틸드가 죽을 때까지 집을 처분할 수 없고, 심지어 마틸드에게 매달 2400유로를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티아스를 절망에 빠뜨린 제도가 비야지(Viager)다. 9세기 시작된 프랑스의 독특한 ‘종신주택연금’이다. 집을 가진 노인이 계약금과 매달 연금을 받고 죽을 때까지 그 집에 사는 조건으로 집을 판다.

계약금과 연금은 집의 시가와 상태, 판매자의 나이와 예상 수명, 주택융자금 등을 감안해 결정된다. 집의 소유권은 계약과 동시에 구매자에게 넘어간다. 처분은 판매자 사후에나 가능하다. 평균 수명 연장과 연금 가치 하락 속에 재산이 집뿐인 노년층이 선택할 수 있는 노후 대책이다.

비야지는 ‘운명을 건 게임’이다. 판매자는 약병을 늘어놓고 기침을 해대거나 움직이기 힘든 척 구매자를 속인다. 구매자는 싼값에 집을 사며 판매자의 수명을 건 도박을 하는 셈이다. 판매자가 빨리 죽으면 성공한 베팅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97년 122세로 사망한 잔 칼망은 90세이던 65년에 비야지로 집을 팔고 32년간 매달 연금(약 500달러)을 받았다. 집주인은 95년 세상을 떠났다.

비야지를 떠올린 건 주택연금 가입 기준 완화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7일 주택연금의 가입 연령(만 60세→50대 중후반)과 가입 제한 주택가격(시가 9억원→공시지가 9억원) 기준을 낮추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 발생하는 ‘소득 절벽’을 막기 위한 포석이다.

서울 강남 3구의 고가 주택 보유자에게도 주택연금의 문이 열리게 되자 당장 부자 혜택 논란이 빚어졌다. 소득이 없어 보유세를 내기 힘들다던 고령의 고가주택 보유자가 연금을 받아 세금 내면 되겠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실제 수령액은 많지 않아 소득 절벽 해소와는 거리가 멀고, 주택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볼멘소리도 있다.

주택연금은 집을 담보로 장기대출을 받아 이자 등을 뺀 나머지 비용을 연금 형태로 받은 뒤 사망이나 만기 때 갚는 역(逆)모기지론이다. 단순히 말하면 빌려서 쓰고 갚는 것이다. 고민이 커지는 건 운명을 건 주판알 튕기기라서다. 하긴 운명은 늘 변수 투성이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