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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시장도, 한강도 사람이 없다···호떡집 "매출 열토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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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상황이 악화된 5일 저녁 한강공원에서는 산책하는 시민들을 찾기 힘들었다. 편광현 기자

미세먼지 상황이 악화된 5일 저녁 한강공원에서는 산책하는 시민들을 찾기 힘들었다. 편광현 기자

5일 저녁 한강 난지천공원에는 바람에 갈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짙게 깔린 안개처럼 희뿌연 미세먼지가 한강변을 둘러쌌다. 강 건너편 풍경은 분간조차 쉽지 않았다. 전깃줄도 미세먼지에 파묻혀 형체를 잃었다. 평소 같으면 사람들이 제법 북적였을 이곳에는 이날 2시간 30분(오후 5시 30분~오후 8시) 동안 산책하는 사람이 4명만 눈에 띄었다. 자전거 트랙을 빼곡히 메우던 자전거족들도 3분에 한명 꼴로 지나가는 정도였다. 그나마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였다.

미세먼지가 시민들의 일상을 앗아가고 있다. 연인과의 산책, 운동장을 뛰노는 체육수업, 길거리 음식 등 당연했던 일상이 이대로 가다간 미세먼지에 밀려날 거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날 서울 연희동에 사는 김현관(71)씨는 반려견인 ‘심바’, ‘랄라’를 데리고 한강변을 산책 중이었지만 힘겨워 보였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책을 나섰던 김씨는 최근 일주일에 1~2번으로 산책을 줄였다. 그는 “정년 퇴직 뒤 반려견들과 산책을 하는 게 인생의 큰 즐거움이었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일상의 소중한 부분이 줄어드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5일 저녁 한강공원에서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간혹 자전거 등을 타는 시민들은 마스크로 중무장을 했다. 편광현 기자

5일 저녁 한강공원에서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간혹 자전거 등을 타는 시민들은 마스크로 중무장을 했다. 편광현 기자

역촌동에 사는 김모(52)씨는 미세먼지를 뚫고 마라톤을 연습하고 있었다. 마스크 끝부분이 땀에 흠뻑 젖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숨이 찬 듯 마스크를 잠시 내렸지만 이내 고쳐 썼다. 그는 “4월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서 연습을 해야 한다”며 “미세먼지가 엄청나서 이대로 가다가는 오래 못 살 것 같다. 정부 대책이 뭔가 손발이 안 맞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텐트 50여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원 캠핑장은 이날 오후 8시 30분까지 손님을 한팀만 받았다. 남자친구와 캠핑장을 찾은 김채윤(20)씨는 주차장 차량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쉬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는 이맘때 가족들과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밤하늘을 구경했는데, 이젠 옛일이 될 것 같다”며 “정부에서 보내는 외출자제 문자도 처음에만 신경을 썼지 이제는 익숙해져서 알림을 끄기 바쁘다”고 했다. 캠핑장 관계자는 “비수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지난해보다 손님이 확실히 줄었다”며 “특히 가족 단위 손님들이 없다. 미세먼지가 정말 피부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평소 퇴근길 직장인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남대문 시장도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자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이태윤 기자

평소 퇴근길 직장인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남대문 시장도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자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이태윤 기자

같은 시각 서울 남대문 시장도 평소에 비해 휑한 느낌이었다. 퇴근길 직장인, 외국인 관광객들로 혼잡하던 시장 골목은 활력을 잃었다. 예전이면 큰 소리로 흥정을 했을 상인들도 마스크를 쓰고 무기력한 듯 앉아 있었다. 호떡이나 분식 등을 파는 음식 판매대 8곳이 줄지어 있는 골목에서 손님이 서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몇몇 상인들은 아예 ‘자체 휴업’을 하고 주변 상인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인근에서 호떡 장사를 하는 유수재(59)씨는 “미세먼지 때문에 영업을 접었다”며 “요즘에는 매출이 반토막이 아니라 열토막이 난 것 같다”고 한탄했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송영단(68)씨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문을 여는데 장사가 아예 되지 않는다”며 “45년 장사 인생에서 가장 위기감이 느껴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남대문 시장 인근 노점을 찾는 손님들도 찾기 힘들었다. 상인들도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태윤 기자

남대문 시장 인근 노점을 찾는 손님들도 찾기 힘들었다. 상인들도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태윤 기자

시장을 찾지 않는 시민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출·퇴근시 회현역을 이용하는 김모(34)씨는 “퇴근 후 어묵을 먹는 게 인생의 낙인데 미세먼지로 위생도 걱정이 되고, 마스크를 벗기도 두려워서 요즘엔 곧장 지하철로 달려간다”고 했다. 회사원 박태하씨는 “밖에만 나오면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평소에 절반도 안 되는데 이해가 간다”고 했다.

수도권의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엿새째 이어진 6일 서울 시내의 풍경도 다를 바 없었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시작한다는 경칩이라는 말이 미세먼지 앞에선 무색했다. 시민들은 마스크에 몸을 숨기고 미세먼지 앞에 움츠러들었다. 이날 점심 서대문구의 한 공원에는 간간이 보이던 노숙인들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공원 운동시설도 찾는 사람이 없어 먼지가 쌓였다. 회사원 김학용(43)씨는 “카페에 들르러 잠깐 밖에 나서기도 부담스럽다”며 “흡연을 하는 동료들도 ‘밖에서 담배를 태우기가 무섭다’고 농담 삼아 말할 정도”라고 했다.

“야외활동 사치인 세상 될 수도”

미세먼지는 도시의 일상마저 조금씩 바꿔버리고 있었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은 비상저감조치로 줄줄이 취소됐고, 개학을 맞은 학교에서도 야외 체육수업을 중단했다. 서울 동마중학교 체육교사 최원상씨는 “더이상 미세먼지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동료 교사들도 고민이 많다”고 했다. 서대문구의 한 고교 체육교사 최모씨도 “야외수업에 민감한 학부모들도 많다. 한창 뛰어놀 아이들이 답답해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야외수업 대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탁구 수업 등 계획을 짜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미세먼지 대란’이 장기화하다가는 시민들의 건강뿐 아니라 삶까지 팍팍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물이나 공기마저 구입하는 시대가 된 것처럼 일상 자체가 미세먼지로 점차 변해가고 있는 것”이라며 “야외보다는 실내나 지하로 사람들의 활동 반경이 줄어들고,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바깥세상을 즐기는 것이 사치인 시대가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손국희ㆍ이태윤ㆍ편광현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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