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붐@월드컵 <10> 선진국에선 축구 즐기지만 우린 어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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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야, 살살해라!"

두리가 평소에 자기를 예뻐하던 황선홍 해설위원(SBS)을 만나 인사를 하자 황 위원이 웃으면서 한 첫마디다.

시청률 경쟁 때문에 힘든 모양이다. 해설을 하려고 마음을 정했을 때만 해도 그 경쟁이 이 정도인지는 몰랐을 거다. 밖에서는 알 수가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도중 한 방송사의 책임부장이 자리를 떠났다. 시청률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늘 마음속으로 '참 좋은 사람이다'고 생각하고 있던 분인데 두고두고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었다. 시청률. 강도는 충분히 느끼고 있지만 그 정도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이유를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해설을 처음 했던 2002년. 방송 3사의 첫 공동중계가 있고 난 날, 식사를 하면서 중계팀의 책임자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중얼거렸다.

"형, 시청률을 조작할 수만 있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중계나 월드컵 관련 프로는 말초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자극적이고 가벼운 재밋거리로. 그리고 "대~한 민국"을 외치게 하는 애국심에 불붙이는 것으로. 진지하게 월드컵이나 경기에 관해 얘기하고 설명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만나기 힘든 상대를 만나 아무리 좋은 얘기를 나눠도 인터뷰 내용을 소화할 만한 여유도 없다. 채널이 돌아가니까.

그러나 축구는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다. 월드컵에 온 세계가 열광하는 것도 축구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축구 선진국처럼 축구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팬들이 많아지지 않으면 2002년에서 점점 멀어져 갈수록 그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이나 신문은 이제 축구를 즐길 수 있도록 역할을 조금씩 바꿔야 한다. 냉정하게 우리를 볼 수 있는 객관성도 심어줘야 한다. 많이 알지 않고는 그들에게 축구를 쉽게 이해시킬 수 없다.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해야 한다. 자국의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문가나 그 경기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나와 재미나고 진지하게 예상도 하고 돌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가?

빨간 옷을 입은 연예인들이 나와 팬들을 선동하고 자극할 뿐이다. 수억원씩 들여서. 축구는 없다. 더 아쉬운 것은 지나친 시청률 경쟁으로 너무 혼탁하다는 것이다. 뭐든지 과열하면 문제가 따르게 마련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 단어 중 하나는 '콜레게(Kollege)'라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 동반자'.

방송국 관계자 또는 해설자 혹은 감독들. 그게 아닌 어떤 부문의 종사자들도 서로가 콜레게라는 인식을 가지고 경쟁한다면 마지막까지 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지나치게 심각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TV가 대중매체로서 역할을 다해 주길 기대할 수는 없다. 방송사의 게시판들은 마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게시판을 보는 것 같다. 광분해서 댓글을 달아 욕을 하고 서로가 헐뜯고. 소속팀의 훈련이 시작되는 바람에 두리가 일찌감치 방송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며칠 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음에도 국민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분석을 했다고 해서 한 해설위원이 그 다음날로 마이크를 놓아야 하는 일이 있었다. 시청률에 결정적으로 피해를 주는 발언이라고 판단되면 내용의 사실 여부나 이해 여부를 심각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같은 콜레게로서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들의 역할이 월드컵을 끌고 가지 못하고 상업주의에 끌려 가는 수준이라면 과연 내가 팬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차범근 중앙일보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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