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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경제부 A과장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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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친구,

자네 어깨가 축 늘어져 있더군.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입 논란이 그렇게 만들었겠지. 믿고 따랐던 선배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크겠나. 게다가 요즘 재경부는 국부를 유출시킨 '매국노' 취급까지 받고 있으니. 자네는 "경제를 살리려 한 일인데 결과가 나쁘다는 이유로 이제 와서 죄를 물으면 어쩌나"라고 했지. 그날 우린 술을 꽤 많이 마셨어.

이제 차분하게 정리를 좀 해보세.

먼저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의 실력 부족부터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론스타는 분명 한 수 위였어. 2003년 여름 외환은행 매각 협상 당시 국내 경제 사정이 깜깜했던 건 사실이야. SK 분식회계 사건과 카드대란 등으로 금융위기설이 끊이지 않았고, 그 한복판에서 가장 위태로워 보였던 게 외환은행이었지. 공적자금을 넣으면 좋았으련만, 국회와 한국은행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애써 외면했지. 언론도 가능하면 외국자본에 파는 게 상책이라는 논조였어.

그때 론스타가 1조3000억원을 들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나. 잘 포장해 팔고 보자는 마음이 굴뚝같았겠지. 하지만 론스타 쪽의 계산도 냉정히 따져봤어야 했어.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 가장 깜깜하다고 하지. 지나고 나서 보니 그때가 바로 시장의 바닥이었어. 론스타는 외환은행의 가치를 좌우하는 하이닉스반도체.현대건설 등 옛 현대 계열사들이 최악의 고비를 넘겨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점에 주목했던 거였어. 당시 외환은행은 옛 현대 계열사들의 채권을 가장 많이 갖고 있었는데, 회생 의문의 부실자산으로 처리해 놓았었지. 이게 정상 자산으로 살아나면 그야말로 대박이었고, 론스타는 여기에 과감히 베팅했던 거야. 아무튼 당시 시장을 보는 안목과 배포에서 우린 분명 뒤졌다고 봐.

하긴 정부의 판단이 옳았던 사례도 있어. LG카드의 처리가 그랬지. 2003년 말 LG카드가 유동성 위기에 몰렸을 때 채권단은 가망 없다며 청산해 버리자고 하지 않았나. 외국인 투자자들 또한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그럼에도 정부가 포기하지 않고 채권단을 설득해 돈을 더 넣도록 한 결과 LG카드는 지금 5조원 가치의 우량회사로 거듭났지.

경제 정책이란 게 결국 최선의 길을 찾아나가는 선택의 과정 아니겠나. 좋은 결과만 나올 수는 없지. 설사 결과가 나쁘더라도 여기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곤란하다는 자네의 견해에 동조하네. "이런 상황에서 어느 관료가 소신껏 일하겠느냐"는 자네 얘기도 옳아. 관료들이 복지부동하면 '국부 유출'보다 더 심각한 '국부 누출'이 일상적으로 빚어질 수밖에.

하지만 지금 일반 국민 사이에선 벌을 좀 내렸으면 시원하겠다는 정서도 있는 것 같아. 이유는 뭘까. 재경부의 '업보'가 있다고 보네. 그동안 국민에게 재경부 관료들은 시장 위에 군림하는 독선적 이미지를 굳혀 왔어. 또 똘똘 뭉쳐 퇴임 후 자리까지 서로 챙겨주는 이기적 집단으로도 비춰졌고. 오죽하면 범죄집단에 비유한 '모피아'라는 별명까지 얻었겠나.

내 생각은 그래. 여론이 야속하더라도 일단 자숙하고 반성하는 모습부터 보여줬으면 해. 아울러 묵묵히 실력을 더 연마하며 할 일은 똑 부러지게 계속 해나가야 하네.

우리는 지금 경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있지 않나. 협상의 성공을 위해선 자네 같은 전문 관료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 하지. 국민은 머지않아 자네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줄 것이라 믿네. 힘내게 친구.

김광기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