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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한국전쟁 계기로 클래식 전향…거장 음악가 앙드레 프레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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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89세로 타계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앙드레 프레빈.    [사진 IMG 아티스트]

지난달 28일 89세로 타계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앙드레 프레빈. [사진 IMG 아티스트]

지휘ㆍ작곡ㆍ피아노, 클래식ㆍ영화음악, 팝ㆍ재즈를 넘나드는 재능으로 ‘음악가들의 음악가’였던 앙드레 프레빈이 2월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8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프레빈의 매니지먼트 IMG 아티스트는 최근까지 고인이 신곡 작곡을 이어갔다고 밝혔지만, 사인과 임종을 지킨 유족 유무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다섯 번의 결혼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배우 미아 패로,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가 소셜미디어와 성명으로 추모했다.
프레빈은 1929년 베를린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 탄압을 피해 프랑스를 거쳐 LA에 정착했다. 비벌리힐스 고교 시절부터 LA의 영화산업과 연계됐고 무성영화의 즉흥 건반 연주를 시작으로 유니버설 스튜디오, MGM에서 편곡과 영화음악 작곡을 맡았다. ‘포기와 베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영화음악 작곡으로 30대 초반에 이미 네 차례 아카데미 음악 관련상을 받았다.
재즈에선 듀크 엘링턴 성향의 멜로디를 강조하는 작법으로 10대부터 저명 음악잡지 그라모폰에 등장할 만큼 작곡 역량을 인정받았다. 1974년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과 함께 한 즉흥 피아노 듀오에서의 테크닉은 20세기 ‘다재다능의 표본’ 레너드 번스타인의 수준을 초월했다. 프레빈은 엘링턴과 번스타인을 각각 재즈와 클래식의 본보기로 삼았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은 프레빈이 재즈에서 클래식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전 차출을 피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에 자원 입대했고 샌프란시스코 사령부 복무 기간에 만난 지휘자 피에르 몽퇴의 레슨을 통해, 지휘자 변신을 굳혔다. 1963년 세인트루이스 심포니에서 클래식 지휘자로 데뷔했고 미국(휴스턴 심포니-피츠버그 심포니-LA 필하모닉), 유럽(런던 심포니-로열 필하모닉-오슬로 필하모닉)에서 음악감독직을 역임했다.
프레빈은 미국 음악가였지만 그를 제대로 예우한 곳은 런던이었다. 1968∼1979년까지 런던 심포니(LSO) 수석 지휘자로 재임했고 BBC ‘앙드레 프레빈의 뮤직 나이트’에 출연해 슬랩스틱도 마다하지 않는 쾌활함으로 클래식팬 증가에 공헌했다. 미국 시민권자로는 이례적으로 1996년 대영제국 명예 기사 작위(KBE)를 받았다. 번뜩이는 재치로 단원을 사로잡은 다음, 사려 깊은 화술과 위트로 마음을 움직이는 건 LSO를 비롯한 그가 거친 악단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프레빈의 매력이었다. 재즈와 클래식의 경계를 완전히 허문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작품과 관현악곡을 직접 치거나 지휘했고, 영국 근대 작곡가 작품에 능했다. 특히 LSO와 남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생애 최고의 앨범으로 꼽힌다.
반면 제2의 고향 LA에서는 LA 필하모닉(1985∼1989) 음악감독을 지냈지만 자신의 허락 없이 에사 페카 살로넨을 수석 객원 지휘자로 발표한 어니스트 플라이슈만 LA 필 운영감독과 갈등한 끝에, 음악감독직을 중도 사임했고 LA 필과 절연했다. “다시는 이 도시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대외에 밝혔고, 심지어 환승편을 고를 때도 LA 공항 경유편은 철저히 배제했다. LA 필하모닉은 올해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50곡의 신작을 위촉하면서 프레빈에게도 작곡을 청했고, 4월 6일 90세 생일을 맡는 프레빈도 LA 필과 재회를 기다렸지만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1972년 데카( Decca) 녹음조정실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왼쪽)와 함께 작업 중인 앙드레 프레빈. [사진 데카]

1972년 데카( Decca) 녹음조정실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왼쪽)와 함께 작업 중인 앙드레 프레빈. [사진 데카]

프레빈은 국제적 명성의 한국 음악가들과도 교분을 나눴다. 1970년 이차크 펄만의 대타로 LSO 무대에 오른 정경화와 만났고 이듬해 LSO 한국 투어를 함께 했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정명훈과도 1975년 LSO 한국 공연을 같이 했고, 정명훈은 “젊은 사람한테 특별히친절히 대하던 프레빈의 자세를 배웠다”고 회고한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유니스 리도 프레빈과 연주했다. 일본 NHK 교향악단은 자주 들렀지만 한국 악단을 지휘하진 않았다.
프레빈은 갔지만 그의 작품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에게 헌정한 모노드라마 ‘페넬로페’가 올 여름 탱글우드 페스티벌에 연주되고 오페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올해 5월 재상연된다. 장례 절차가 끝나면 여러 레이블과 출판사에 남겨진 프레빈 관련음원과 악보 관련 재산 관리인도 외부에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한정호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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