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밤 중국의 단둥(丹東) 도심에서 20여㎞ 떨어진 진탕루(金湯路). 칠흑같이 어두운 철로 위로 밤 10시 39분(현지시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탑승한 전용 열차가 휙 하며 눈앞을 지나갔다. 화물칸으로 보이는 10여량과 창가에 불이 켜진 객차 4~5량 등 총 22량의 열차였다. 열차가 눈앞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1분 20여초. 시속 60~70㎞다. 열차가 통과하자 철길 옆 어둠 속에서 손전등이 하나둘씩 켜지더니 공안 수십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당국은 후미진 철길에까지 경찰을 배치했다. 이른바 김 위원장 ‘1호 열차’의 경비를 위해서다.
이번엔 객차번호 가렸다…바닥ㆍ벽도 방탄 하노이행 ‘1호 열차’
김 위원장은 지난달 6일 중국 방문 때 열차를 이용했다. 당시 평양역을 출발하는 사진에는 차량 번호가 공개됐다. 하지만 23일 베트남을 향해 평양역을 떠나는 북한 매체의 사진에선 그가 탑승한 차량번호가 가려져 있었다. 탑승 위치도 달라져 있었다. 보안을 위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고위 탈북자는 24일 “ 1호 열차는 무진동 차량에 가깝도록 개조돼 편안함을 극대화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호 열차는 방문 장소와 목적에 따라 차량 구성을 다르게 한다. 이번처럼 장거리 여행에서 1호 열차는 말그대로 달리는 사무실이다. 특히 김 위원장이 거주하는 객차는 창문은 물론 열차 바닥과 벽 등을 방탄 처리해 외부 공격에 견디도록 했다. 또 침대 객차와 집무실 겸 회의실 객차에는 별도의 공기공급장치도 달려 있다고 한다. 집무실 책상 뒤편에는 대형 LCD 모니터를 장착해 열차의 진행 위치 등 각종 운행 정보를 볼 수 있다. 1호 열차에선 인공위성으로 연결된 전화와 인터넷이 사용 가능한 것으로 정보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응급 수술이 가능한 의료시설이 갖춰진 객차도 연결돼 있다. 안병민 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열차는 기관차 1~2대로 객차와 화물차 등 여러 대를 끌고 갈 수 있다”며 “차량별로 연결과 분리가 가능해 필요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열차 1량을 수행원들의 침실 등 거주공간으로 꾸몄다고 한다. 집무실 겸 회의실 객차에는 10여명이 앉아 회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이번 22량의 전용 열차에는 냉장시설이 갖춰진 식료품 객차, 식당 객차가 붙어 있고 김 위원장이 현지에서 이용할 전용 승용차 등도 함께 실린 것으로 관측된다. 고위 탈북자는 “초기 북한의 1호 열차는 소련의 스탈린이 선물했다”며 “40년 이상 사용해 노후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시해 바꿨고 이후 여러 차례 수리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김일성 주석이 사용하던 열차는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 전시돼 있다”며 “김정일 열차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어 현재의 전용 열차는 신형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통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을 태운 전용 열차가 어떤 경로를 이용하더라도 하노이까지 이동하는 데만 50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 만큼 김 위원장의 이번 베트남 방문은 열차 강행군이다. 그럼에도 장거리 이동인 항공기보다는 중국 당국의 보안 지원 속에 지상을 달리는 열차가 더 안전한 수단이다. 베트남 정부는 26일 새벽부터 국도 1호인 랑선성 동당부터 하노이까지 170㎞를 폐쇄한다고 예고했다. 김정은 전용 열차는 북ㆍ미 회담일 전날 광시(廣西)장족자치주를 벗어나 베트남 국경을 통과한다는 의미다.
앞서 23일 밤 김 위원장이 탑승한 전용 열차가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압록강 철교에 진입한 것은 오후 9시 18분. 지난해 3월과 올 1월 김 위원장의 방중 때와 마찬가지로 늦은 밤에 북중우의교(朝中友誼橋)을 통과했다. 김 위원장이 탄 열차는 1㎞ 안팎의 다리를 5분여에 걸쳐 천천히 지났다. 같은 시간 압록강 철교를 볼 수 있는 주변 호텔의 강변 쪽 창은 모두 비워진 채 커튼이 쳐졌다. 평소 단둥 시민들이 야간 산책을 즐기는 철교 주변 압록강변 공원은 열차 통과 한 시간쯤 전부터 시작된 통행이 금지됐다. 강가 공영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은 모두 이동시켰다. 9시 전후로는 강에 경비정까지 출현했다. 강가 행인을 확인해 주위 경찰과 연락해 자리를 뜨게 했다. 단둥의 한 소식통은 한밤중 북·중 국경 통과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자정을 훨씬 넘긴 새벽에 지나가곤 했다. 김정은은 선대보다는 그나마 나아진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성이나 공중 정보자원에 노출되지 않으려는 의도”라며 “그만큼 경호와 자신의 안위를 중시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정용수 기자, 단둥ㆍ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