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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 신고 마돈나 꿈꾼 ‘상남자’ “둔갑하면 다른 자아가 생겨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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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호 19면

[아티스트 라운지] 괴짜 소리꾼 이희문

이희문과 프렐류드, 놈놈의 콘서트는 3월 6일 저녁 7시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인섭 기자]

이희문과 프렐류드, 놈놈의 콘서트는 3월 6일 저녁 7시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인섭 기자]

폭탄머리 가발에 진한 화장, 미니스커트에 망사스타킹까지 신고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무대를 휘어잡는 남자가 있다. 글램록 스타일의 ‘가면’을 쓴 이 남자의 정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이희문(43)이다.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오방신’으로 출연해 매주 파격적인 변신으로 화제를 낳고 있는 그의 퍼포먼스에 제대로 빠져볼 수 있는 무대가 펼쳐진다. LG아트센터의 러시아워 콘서트 올해 첫 주자가 그다.

‘도올아인’ TV 프로 출연 화제 #망사 스타킹 신고 진한 화장까지 #도올 선생은 내가 홀딱 벗었다 말해 #가수 꿈 키우다 국악에 입문 #내 노래 전통이 무기, 재해석 시도 #시대와 호흡하는 민요 짓고 싶어

“가면을 쓰는 거예요. 다른 자아가 생기거든요.”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를 찾은 그에게선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얼굴이 반짝이 안료로 덮혀갈수록 마치 딴 사람이 된 듯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놨다. “원래 제 레퍼토리 중에 현대판 굿이 있거든요. 민요가 무속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박수무당의 중성적 이미지를 차용해본 거죠. 씽씽도 오방신도 다 그런 컨셉트에요.”

사실 그는 프로젝트 밴드 ‘씽씽’으로 해외에서 먼저 떴다. 2017년 미국 공영라디오 NPR의 ‘Tiny Desk Concert’에서 공연한 영상이 유튜브 250만뷰를 찍은 것. ‘씽씽’의 팬인 배우 유아인의 섭외로 방송까지 진출하게 됐다. “원래 방송은 기피했었고 ‘씽씽’도 해체한 상태라 처음엔 고사했는데, 음악 컨셉트에 전적인 권한을 주셨어요. 새로운 작업을 해볼 기회니, 오방신장이 다양하게 ‘육갑 둔갑’하는 컨셉트로 잡았죠. 도올·아인과 잘 맞냐구요? 맞겠어요?(웃음) 맞추는거죠. 어차피 다방면에 소통을 도모하는 방송이거든요.”

그에겐 ‘세 명의 엄니’가 있다. 생모인 고주랑 명창과 스승인 이춘희 명창, 현대무용가 안은미다. 가수 민해경을 동경해 가수 꿈을 키우다 포기하고 뮤직비디오 회사를 다니던 그는 27살 늦은 나이에 국악에 입문했다. 모태에서 물려받은 끼를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던 것. 재능을 발견해준 이춘희 명창을 사사했지만 국악인의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튀는’ 캐릭터이다 보니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으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건 안은미를 만나고부터다.

“2007년 안 선생님의 ‘프린세스 바리’ 주역으로 발탁돼 여성도 남성도 아닌 괴생명체로 10년동안 유럽 장기투어를 다녔어요. 소리를 계속해야되나 기로에 서 있던 차에, 눈치 안 보고 뭐든지 할 수 있는 피신처를 얻었죠. 경계 밖으로 나가서도 소리 활동을 할 수 있단 걸 깨닫고 우물을 벗어난 거죠.”

2009년 안은미컴퍼니를 본따 만든 ‘이희문컴퍼니’는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민해경을 동경해 열심히 춤을 추고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이력은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와 다양한 연출로 거듭났다. 잠재된 여성성도 한몫 했다. “제가 여성적인 면이 없지 않아요. 어려서 엄마를 몰래 따라하던 기억도 있고. 그러니 이런 걸 할 수 있지, 누가 시키면 하겠어요? 근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저더러 다 ‘상남자’래요.(웃음)"

이희문

이희문

큰 인기를 끌었던 ‘씽씽’이 록과 민요의 만남이었다면, 재즈밴드 ‘프렐류드’와 두 제자 ‘놈놈’과 함께 하는 이번 공연은 민요와 재즈의 만남인 ‘한국 남자’ 프로젝트다. "민요 가사들이 대부분 여성 애환을 달래는 가사잖아요. ‘지금까지 속썩었던 여성들을 우리가 위로해주자, 잘못을 인정하고 달래주자’는 컨셉트죠. 근데 하다보니 ‘한국 남자’란 단어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더군요. 뭐, 한국 남자도 다 다르잖아요. 밀고가는 거죠.(웃음)”

늘 파격만 추구하는 건 아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을 때도 있다. "제 노래는 사실 전통 그대로예요. 제겐 전통이 가장 큰 무기여서 그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어요. 경기민요하는 남자소리꾼은 100명에 한 명 꼴인데, 어느 시점에서 왜 남자가 줄었나 같은 역사 아카이브 작업이 ‘깊은 사랑’ 시리즈죠.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노래를 하는 1인극 형식인데, 희한하게 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민요 역사가 자연스레 나오더군요.”

그는 ‘창작 판소리’처럼 민요도 전통의 틀을 벗어나 창작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이 시대에 맞는 텍스트 만들기가 큰 과제다. "우리 소리는 텍스트가 중요해요. 100년을 내려온 민요 가사는 지금 들어도 공감이 되죠. 몇 년전 ‘이 시대의 아리랑’을 만들어보라는 공모전도 있었는데, 시대를 시사할 수 있는 노래가 많이 나왔어요. 저는 전통이라는 단어를 다시 해석하고 싶어요. 전통이야말로 가장 트렌디해야 된다고요.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핫해야 50년, 100년 후에 전통이 될테죠. 피어보지도 못하면 어떻게 시간을 관통하나요. 그래서 ‘내가 하는 게 바로 전통이다’라고 감히 말합니다. 내가 지금 잘해야 민요가 100년 후에 불릴테니까요.”

민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있는 그의 ‘트렌디’한 행보가 대중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대중의 사랑이 덤으로 따라왔다는 것이다. "내 DNA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망사스타킹 신는 게 쉽지는 않았죠. 처음엔 두드러기, 역류성 식도염까지 생겼는데, ‘넌 민해경과 마돈나가 되고 싶은 애잖아. 어중간하게 하지 말라’는 안은미 선생님 말씀 덕에 색깔을 찾을 수 있었어요. 도올 선생도 그러시더군요. 얘가 뭐 많이 두른 것 같지만 사실 홀딱 벗은 거라고. 제 자아와 결핍된 부분까지 다 드러냈다는 얘기죠. 내 모자람을 드러내니 그 이면을 바라봐주며 박수쳐 주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 바람에 내가 치유받고, 관객도 그런 내 모습에 치유받는 것 같아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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