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원탁 모델의 정치를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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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치에서는 누구나 이기고 진다. 하지만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는 깊이다. 그래야 미래를 선택할 수 있고 궁극적인 승리를 향해 갈 수 있다.

이번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도 그렇다. 이 사건을 '코드 인사와 부적격자에 대한 정당한 결정'이냐 '국정 발목잡기'냐는 논점으로 모는 것은 너무 협량하다. 그보다는 지금 우리 정치의 구조가 얼마나 취약하고 국가가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야 마땅하다.

사실 우리가 마주한 국가적 난제들은 정치권이 힘과 지혜를 모아도 버거운 것들이다. 성장 잠재력이 쇠진되고 있는 경제의 활력을 어떻게 살릴지 난감하지만 머리를 맞대야 한다. 떠나고 싶은 유혹에 휘둘리는 기업과 젊은이들의 마음도 어쨌든 잡아야 한다.

한.미관계의 현실과 국제적 명분이 충돌하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머뭇거릴 수 없다. 모든 지역의 염원인 지방분권이나 균형 발전에 대한 법안들도 정기국회만 기다리고 있다. 예산안도 통과해야 한다. 부안 핵폐기장 문제도 더 이상 놔둘 수 없다.

그런데 여당은 '법적 여당'과 '정신적 여당'으로 갈려 있고, 청와대와 국회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다. 대한민국의 국회는 제도적으로 강한 국회다. 국회의 협력없이 국정 현안과 개혁 과제를 실현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강한 국회와 약한 청와대가 확인되면 관료사회도 눈치를 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정운영 시스템을 교란시킬 복병이다.

그러므로 이번 부결 사태를 계기로 청와대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대통령까지 나서 호소했는데 부결된 것에 대해 감정적 서운함이 클 수 있다.

그럼에도 비서실장이 흥분한 얼굴로 기자회견까지 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 열정적인 지도자의 참모는 얼음보다 냉정해야 한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의 통찰에 의하면 '먼저 보고, 넓게 보고, 뒤집어 보고, 깊이 보고, 다시 보는 것이 유능한 참모의 성공 비결'이다.

일각에서는 이 기회를 통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구 정치세력으로 몰아붙여 신당을 키우자는 전략을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국회보다는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편이 낫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유혹이고, 국가를 더욱 위기에 몰아넣는 아랫길의 전략이다. 윗길의 방안은 말 그대로 청와대가 초당적 위치에서 정부-국회의 신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대통령도 민주당 당적을 빨리 버리고 신당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이와 함께 총선 때까지 대통령과 청와대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발언과 행동을 삼갈 것을 천명해야 한다. 내년 선거에 나가고 싶은 참모가 있다면 국가와 대통령을 위해 지금 물러나야 지혜롭다.

이런 전제 위에 '정당 끌어안기'에 나서야 한다. 야당과 국회 지도부를 만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지 않는가. 대통령이 진실로 국회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면 정책 협의체 구성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현안들은 정치적 각을 세워야 할 사안들이 아니다.

그야말로 '국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의제들이다. 대립을 격화시키는 '바리케이드 모델의 정치'가 아니라 둘러앉아 숙의하는 '원탁 모델의 정치'만이 국정 운영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야당들도 적극 협력해야 한다.

원탁 모델의 정치는 '타자의 벽'을 허무는 과정이다. 그것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실험이다. 정치의 중심에 적개심과 분노 대신 이해와 설득이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을 이런 계기로 승화시켜 보자. '타자를 끌어안는 것'이 주는 감동은 세상 어느 것보다 깊은 것이다. 이런 감동을 주는 정치야말로 지혜의 정치이자 통합의 정치가 아닌가.국민이 보고 싶은 장면이 바로 이것이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