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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곁가지에 꽃 필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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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실업자 122만 명, 정점을 찍었다. 이 우울한 시기에 빛고을 광주가 일을 냈다. 진입장벽이 유별난 자동차공장을 유치해 시민기업을 출범시킨 것이다. 정규직 1천 명, 고용효과 1만 명, 거기에 식당, 숙박업, 물류 서비스를 합하면 광주가 뜻밖의 활기를 찾을 듯하다. 호남 예향(藝鄕)의 감성이 스멀대는 곳에 근육질 제조업이 과연 맞을까를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영남 예향인 통영이 조선업 침체로 다 죽어가는 상황이다.

산업사상 첫 탄생 시민기업인 #광주형 자동차공장 반갑지만 #개념바뀐 산업의 곁가지 우려 #IoT·AI 장착 미래차 시대에는 #경쟁력늘릴 ‘노사민정’ 합의 절실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자본금의 30%를 조달하는 ‘시민기업’이 산업사상 처음으로 탄생했다! 광주의 이 과감한 실험은 기업이 빠져나가 을씨년스런 군산과 구미가 정신이 번쩍들 자활책이다. 그런데 성장잠재력이 바닥을 드러낸 자동차산업에 숨구멍을 뚫긴 했지만, 냉정히 보면, 생장이 멈춘 끝가지에 곁가지를 접붙였다고 할까. 패러다임 변혁이 없는 지역 아웃소싱이다. 개념설계가 완전히 바뀐 자동차산업에 곁가지를 붙인다고 꽃이 필까? 언론 보도처럼, 생산 대수가 인도, 멕시코에 밀려났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생산체제가 이미 낡았음에도 개념적 변신을 지휘할 정책 패키지와 그걸 실행할 현장 사령부가 허약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글로벌 5위까지 치고 올라간 현대자동차의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 전기자율주행차, 수소차에 승부를 건 것은 운명적 필살기였는데, 6만 명 노동자 군단과 더불어 가야 하는 지상최대의 난제가 쌓였다. 최강 투쟁력으로 무장한 민노총의 독전대, 이 노동군단이 임금 하향압력을 쏟아내는 광주형 공장을 달가워할 리 없다. 현대차 초봉 5,500만 원의 64%를 받아도 SUV 경차를 근사하게 뽑아내는 풍경을 굳이 만천하에 드러낼 필요가 있겠는가. 급기야 민노총은 이 작은 곁가지를 ‘문재인정부의 정경유착이자 노동적폐 1호’로 낙인찍었다. 해외공장의 저임노동이 울산의 고임노동으로 역류된다는 사실은 덮은 지 오래다. 인도 공장 평균 연봉은 1,200만 원, 중국공장은 2,400만 원 수준이다. 후진국 시절 우리도 겪었으니 오늘의 고임금이 부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일자리 부족에 신음하는 청년들을 둔 채 철옹성 직장 사수와 일감 독점을 외치는 게 ‘정의로운 대한민국’인지 헷갈려 하는 말이다.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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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전통적 개념과 구조는 거의 파괴되었다. 테슬라는 3D 프린팅으로 찍어낸 전동차이고, 벤츠가 1885년에 고안한 ‘모터 마차’는 IoT, AI, 첨단 센서를 장착한 자율주행 커넥티드카로 변했다. 미국의 ‘로컬 모터스’(Local Motors)라는 기업은 디자인, 부품, 전장제품을 마치 옷을 깁듯 고객의 입맛에 맞춰 주문 생산한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미래자동차는 20세기 내연기관이나 대량생산과 벌써 결별했다.

‘인터레그넘(interregnum)’에 이미 접어든 한국의 제조업에서 철옹성 고임금 직장도 디지털 혁명이 일으키는 쓰나미 앞에 위태롭다. 체제전환의 불안한 모색기가 인터레그넘인데, 자동차도 AI와 컴퓨터공정으로 획기적 변신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진정한 위기다. 그런 눈으로 보면, 반갑기 그지없는 광주형 시민공장은 지각변동에 대처할 신개념은 아니다. 연명치료의 궁색한 수단이자 위기관리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디지털 변혁에 대비해서 울산 공장에도 자율주행 수소차가 달리기는 한다. 현대차의 수소차 기술력이 토요타나 닛산보다 우월하다고 해도, 조선산업의 극한 침체가 어디 기술 부족에서만 비롯되었는가. 미국 GM은 흑자에도 불구하고 작년 11월 미국 공장 다섯 곳을 폐쇄하고 1만 4천 명을 해고했다. 마치 군산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영미식 자본주의의 이 비정한 감원전략을 피하려면 경쟁력 배양이 필수적이다. 경쟁력은 기술, 제도, 인력의 매직 코디에서 나온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드라마 ‘SKY캐슬’의 코디같이 노사민정 합의를 지휘할 카리스마 넘치는 조율사는 어디에 있는가.

인터레그넘을 성공적으로 건너뛸 코디가 없으면 이른바 혁신적 살생기업(killer company)에 먹힐 위험이 증가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오늘도 킬러 컴퍼니가 속속 태어나고 있다. 미래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는 것도 모르고 죽어갈 기업이 수두룩하다. ‘로컬 모터스’는 컨베이어벨트를 돌리는 자동차기업을 수장시킬 것이다. 우버와 카카오카풀은 서울, 부산, 대구 택시업체를, 에어비엔비(Airbnb)는 현란한 호텔체인을 죽일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는 공유경제 참여자와 고객을 호령하는 제국의 군주로 등극할 때가 온다. 광주형 시민기업, 빛고을에서 쏘아 올린 이 작은 빛이라도 지켜야 그나마 인터레그넘을 건넌다. 사회연대로 태어난 이 곁가지에 꽃을 피워야 할 절박한 이유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