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스필오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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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방송전파가 국경을 넘어 인접한 다른 국가영토에까지 가시청권을 미치게 하는 현상을 스필오버(spill over) 혹은 전파월경(電波越境)이라고 한다.

이런 방송용어가 정치.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체제의 대결이 극에 달했던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이 서로의 체제를 뚫고 들어가는 첨병으로 이를 활용하면서였다.

냉전은 종식됐지만 이런 스필오버를 활용한 전파의 전쟁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국제화가 강조되고 수십개의 외국 방송이 실시간대로 밀려드는 시대에도 각국은 여전히 전파월경에 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특히 인접국 간에 종교나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역사적 갈등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일 경우엔 반응이 더 민감하다. 외국 위성방송들이 허위정보나 조작정보를 퍼뜨려 인종적.종교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고, 상업광고들이 시장질서를 파괴해 국내 산업 보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스필오버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일반화된 인터넷과 휴대전화다. 특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은 휴대전화 서비스의 자동로밍을 실시하지 않아도 일부 지역에서 상대방 나라의 가입번호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요즘 이런 휴대전화의 스필오버 때문에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에서 중국 휴대전화 서비스를 이용하는 북한 주민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런 휴대전화는 통화기록이나 내용이 북한 당국에 의해 전혀 통제받지 않아 인기가 높다고 한다.

휴대전화의 보급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듯 문화와 사회를 바꾼다. 신뢰하는 개인들 간의 통제받지 않는 은밀한 통화는 독재국가와 독재자들에겐 큰 위협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북한의 중국 접경지대에서 이런 휴대전화 사용을 단속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 중인 모양이다.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면 이런 현상은 오히려 기업들에 가만히 앉아 새로운 지역의 시장을 개척하는 비즈니스의 기회를 창출해 줄 수도 있다. 이를 활용해 지역 간 통합과 상호의존성도 더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체제를 굳게 닫고 불안에 떨기만 한다면 과거 냉전시기 전파월경을 막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산업의 발전도 저해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다.

김석환 논설위원